사설

[사설] 교황청ㆍ소련 수교 합의

입력일 2021-01-11 15:55:23 수정일 2021-01-11 15:55:23 발행일 1989-12-17 제 1684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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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지난 1일「바티깐」에서 처음 만나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번 역사적인 만남은「세계무신론자들의 대표」와「베드로의 후계자」의 역사적 화해란 점 에서 의미를 갖는다. 1917년 조직화된 무신론이 공산주의라는 탈을 쓰고 소련에서 권력을 잡은 이후 72년 만에 반종교 전쟁을 종식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번 사건을 교황청이 그동안 은밀히 그리고 인내와 끈기를 갖고 꾸준히 추진해 온 대 공산권 정책의 결실로 받아들이면서 특히 현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쏟아 온 열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황청은 1963년 이래 지금까지 공산주의 정권의 대두로 중단된 동구라파 여러 나라들과의 접촉을 시도해 오면서 교회에 대한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조용한 외교를 통해 다소의 활동공간이라도 확보하고자 노력해왔다. 그 결과는 동구라파 여러 나라의 교회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으며 최근 세차게 일고 있는 개혁의 물결도 결코 바티깐의 이러한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지난해 6월、 소련의 그리스도교 전래 1천 주년을 기념하여 국무원장 까사롤리 추기경 등 8명의 추기경을 소련에 파견한 바 있다.

이때 바티깐의 대표단으로부터 소련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교황의 친서를 전달받은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한 구체적 응답으로 금년 2월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 대성당을 교회에 반환하는 한편 7월에는 백러시아 공화국의 민스크교구에 60년 만에 처음으로 교황의 주교임명을 허용하고 소련의회에서는 종교의 자유 법안을 검토하게에 이르렀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의 지도자가 바티깐의 교황을 방문한 것은 분명 세계사적 상징성과 중요성을 갖는다. 고르바초프가 종교 신앙 때문에 가톨릭에 추파를 던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목적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소련은 마약、 음주、 자살、 낙태와 50%에 이르는 이혼율 등 소련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그리스도교의 힘으로 극복하려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교황방문은 결국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마르크스 ㆍ 레닌주의와의 결별을 공식 선언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소련이 과거 70년 동안 추진해온 사회주의적 인간형(型)의 창조에 실패했음을 공인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교황으로서도 소련 및 그 영향권 하에 있는 동구라파의 새로운 복음화야 말로 중대한 과업이 아닐 수 없고 교황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은 이러한 관점에서 선교 3천년대를 바라보는 교회의 입장에서도 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번에 고르바초프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채택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남은 과제는 아직도 많다. 그러나 교황과 고르바초프의 이번 만남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준다. 그것은 무엇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17년 5월13일부터 10월13일까지 매 13일 6회에 걸쳐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예언대로「러시아인들이 회개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만남은 40년 이상 얼어붙은 동토(凍土) 북한에도 그 영향을 미쳐 우리 민족에게도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는 그날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더한층 굳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