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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169.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입력일 2020-11-18 13:41:26 수정일 2020-11-18 13:41:26 발행일 1989-10-22 제 167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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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버지』

1,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자아계시는 『아빠, 아버지』라는 말로 유일하게 표현됩니다. 『아빠』는 마르꼬 복음(14,36)의 희랍어 본문에 보존되어 있는 아라메아 단어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당신아버지께 말씀을 건네실 때 나타납니다. 이 날 말은 비록 모든 언어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자렛의 예수의 입술에 오를 때 우리는 그 유일한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고 배타적 관계

2, 사실 「아빠」는 전통적인 하느님 찬미를 나타낼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마태오11, 25참조) 예수님이 사용하신 바와 같이 그것은 또한 아버지와 당신 자신사이에 상호 존재하는 유일하고 배타적인 관계에 대한 당신의 깨달음도 암사합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 (11,27) 과 루가복음 (10,22) 에서 우리를 위해 보존된 말로 예수께서 그토록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암시하는 바로 그 동일한 실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빠』라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 유대의 신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 성삼 깊숙이 있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에 대한 진리, 영원한 사랑의 숨결을 일으키는 저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지식을 요약하기도 합니다.

아들ㆍ아버지의 인격통교

3, 아빠라는 말마디는 가정생활의 어휘에서 채택된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인격적 통교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인격적 통교를 말해줍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에게 말하기위해 이 말마디를 사용했을 때 그의 청중들은 틀림없이 의아해했고 스캔달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면 기도에서 조차도 그것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단어의 본뜻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아들로 여기신 분만이 아버지로서 그분에 대해 그리고 그분께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빠」, 또는「내 아버지」, 「빠빠」(Daddy)!

『아빠』라 부를 권리

4,예레미아의 한 본문은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말합니다 『네가 나를「내 아비」라 부르기를 바랬다』(예레미아3,19). 그것은 말하자면 메시아 시대에 성취될 예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녀다운 표현「아빠」를 사용하여 『아버지를 알고 있는』분으로서 아버지와의 관계 하에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자렛의 예수에 의해 성취되고 능가됩니다. 그분은 단순하게『아빠─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아버지께 말을 건넬 권리를 가진 분으로서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빠』『아버지』의 차이

5,복음기자들은 이 모두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마르꼬 복음에는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중 다음과 같이 예수께서 부르짖은 것으로 나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르꼬14,36). 비록 아라메아 말이 문자 그대로 인용되지는 않고 있지만 마태오에 나오는 병행구는 『내 아버지』 즉 『아빠』(마태오26,39~42) 입니다. 복음의 본문이 다만 『아버지』라고만 말할 때라도 (루가22,42처럼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 요한12,27에서도) 그 본질적인 의미는 같습니다.

「하느님」과 「아버지」

6,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는 말, 그리고 특히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실 때 그분이 의미하는 것은 『아빠─내 아버지』라는 것을 당신 청중들에게 이해시켰습니다. 그래서 겨우 열두 살이 된 어린 시절에도 자기를 사흘 동안 찾아다닌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분의 생애 마지막에, 당신의 사명을 마무리 짓는 대사제의 기도에서 하느님께 청하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주십시오』(요한17,1).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요한17,11)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시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요한17,25).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이미 세상의 종말을 내다보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오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마태오25,34) 하고 선포하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23,46) 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 후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루가24,49).

『우리 아버지』

7,그토록 깊이 『아버지를 알고』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 (요한17,6참조)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분에게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루가11,1참조) 하고 청했을 때 그분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대답은 이 아버지를 계시하는 중대한 순간입니다. 그때 그분은 『우리 아버지』(마태오6,9~13) 또는 『아버지』 (루가11,2~4) 라는 말로 시작되는 기도를 그들에게 구술해 주셨습니다. 이 기도의 계시를 통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의 아들 됨에 특별히 참여함을 알게 됩니다. 그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언에서 『그분을 맞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즉『사람이 되신』 말씀을 맞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1,12) 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그들은 당연히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8,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언제나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를 구별하십니다. 부활 후 다시 그분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요한20,17). 더우기 복음 구절 어디에도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아빠』라는 말로 기도하도록 권한 데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용어는 오로지 아버지와 아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임의 아빠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에서 분명하듯이 실재에 있어서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여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그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 (양자) 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갈라디아4,4~5성 토마스,Ⅲ,q23aaㆍ1과2참조) 라고 갈라디아 인들에게 말하는 성 바오로를 따라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우리의 입양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에 힘입어『아빠!』

9,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뒤이어 나오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4,6).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드시는…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 (양자) 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8,15). 그러므로 양자 (그리스도 안에 입양된 『아들 안의 아들들』이라고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로마서8,29참조』 들로서 우리가 하느님께 『아버지』『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예수께서 비할 수 없이 친밀하게『아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똑같은 하느님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