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73년「로마」에서 개최된 아빠스 총회를 위한 준비위원회에서 발표한 주제 내용인데 본문이 대단히 길어서 기도 부분에 이어 일 부분만을 요약 번역하여 소개한다.
『자신의 죄를 아는 자는 기도로써 죽은 이를 살려내는 자보다 더 훌륭하다.
누가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이나마 괴로워 한숨을 짓는다면 그는 온 세상을 가르치는 자보다 더 훌륭하다. 자기 자신의 약점을 아는 자는 천사를 바라보는 자보다 더 훌륭하다. 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의 총애를 받는 자보다 더 훌륭하다』「쉬러」의성 이사악은 이 역설로써 본래의 크리스찬적 회심을 강조하였다. 크리스찬적 회심은 성신의 열매이며 영혼 안에서 그분이 움직이신다는 뚜렷한 표시이다.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바로 같은 순간에 자기의 죄를 인식할 수 없다. 이는 먼저도 아니고 후에도 아닌 바로 같은 그 순간에 오직 그 순간에 영신적인 바라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화해하시는 그 순간에 또 은총으로 변했을 때에 그 죄는 사람의 마음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체험케 하신다. 그래서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인식하는 길은 회심의 길이며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회심을 하기 전까지는 하느님은 오직 한 말씀뿐이고 개념ㆍ갈망ㆍ예감ㆍ철학자와 시인들의 하느님이셨을 뿐 넘치는 사랑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은 아니셨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살고 먹고 또한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오셨지, 의인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신다. 죄인이 자신의 죄의 밑바닥을 알게 될 때에 하느님의 자비의 심연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무엇보다 먼저 복음에 대한 체험을 눈 앞에 그리게 된다. 그들에게서 또 그들과 비슷한 이들 가운데서 하느님은 당신의 원의대로 인간을 상봉하며 그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적 환경 속에서는 하느님 자신이 직접으로 구원을 주시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죄와 용서가 동시에 생기는 은총의 순간 밖에서는 오직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은 힘과 자비, 분노와 사랑이다. 하느님께 대한 이야기를 할 때와 생각을 할 때에는 위와 같은 항변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항변은 하느님이 죄인에게 그의 죄를 사해 주시면 언젠가는 참으로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케 되므로 없어질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이 분노이며 동시에 사랑이시라는 복음의 증언, 즉 진리와 사랑을 아무 설명도 없이 알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런 것들을 요구함을 알지 못하면 아무도 감히 하느님의 의노 앞에 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하느님은 감정적인 독재자가 아니며 더구나 마음 좁은 할아버지가 아니시다. 그 분은 이런 개념이나 상상에서 유도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얕은 이해보다는 신비가 가득하고 모순이 가득한 분이시다. 그분의 심오한 신비 속에서 회심하는 자만이 이를 알아들을 것이다. 회심이란 회랍말로「meta-noia」이며「다시 되돌아온다」「마음을 돌린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 안의 영적 내적 과정을 의미하며 그로 인하여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모든 사리사욕과 계획에서 즉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동시에 그분의 의노와 사랑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는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분노가 일 순간에 사랑의 불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은 참으로『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이시다』(신명기 4ㆍ24) 회심 안에서 사는 자만이 참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분노를 정말로 인식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측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