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해다』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말일뿐 아니라 아무도 이것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인간에게 고통이란 뱀대가리에 꼬리가 붙어 다니듯 붙어다닌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원치않을뿐 아니라 고통을 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에게 고통이 없어지는 그것이 바로 낙원이 되고 말것이다.
인간이 낙원을 묘사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고통이 없는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부활한 육신의「사기지은」이란 것도 상처를 입고 죽을 수 있는 인간에게 상하지 않는 은혜와, 추한 인간에게 빛나는 은혜와,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한받은 인간에게 빠른 은혜와, 우둔하고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사마침의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활한 육신에겐 고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하간 고통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처절한 문제이며 예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온것 만은 사실이다.
그러면 고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고통은「아픈 것」이다. 고통은「불쾌한 것」이다.
고통은「원치 않는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만으로 고통 그 자체가 무엇이라고 규명했다고는 할 수 없다. 고통의 본질을 인간은 끝끝내 정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알수있는 것은 그가 항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그것뿐이다.
그런데 고통은 항상 인간의 주체와 함께 존재한다. 즉「나」라고 할 수있는 인간에게만 고통이 있을수 있다. 동물은 고통을 받지않는다. 왜냐하면「나」라는 인식이 동물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 우주속에 고통이 가득 채워져있는 창고가 있어서 거기에서 인간이 고통을 분배받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내가 있고 또 내가 그것을 인식해야만 그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잘려진 내 손을 불에 태운다 하더라도 비록 징그러울 수는 있겠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며, 마비된 손바닥에 불을 껴얹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을것이다. 또 가장 좋아하던 친구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비보를 받기전까지는 고통의 원인이 될수는 없는것이다. 고통은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하고, 또 내가 인식해야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인식을 상실하는 순간이기에 고통과 이별하는 순간이 되고 말것이다.
고통에 있어서 또 한가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뿐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고 보람있는 것이 될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가 간수의 감시하에서 돌을 깎는것은 어쩔수 없이 당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될 수 있는데 조각가가 대리석을 깎는 것은 식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보람있고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란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오히려 보람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또 고통은 건강상태와 정신상태에 따라 심할 수도, 가벼울 수도 있다. 건강이 좋고 기분이 좋을 때는 고통스러운 것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수 있으나 그와 반대일땐 아주 작은 불쾌한 일이라도 크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것이다. 일기의 불순을 불쾌지수로 측정하지만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도도 불쾌지수로 측정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고통에 대해서 인간은 항상 당하는 기분을 면치못한다. 인간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고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인간을 더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고통은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항상 주고있고 자기자신이 자기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고통의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고해』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사회 문명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비록 아픔과 빈곤과 고독과 무지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고통은 해결할 수 없을것 같다. 그래서 고통은 종교분야에 속하는 문제이다. 불교의 시발점이 바로 고통의 문제였으며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종교로 등장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인들도 적어도 한번은 이 고통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고 여기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없애려는 종교는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믿는 종교다. 그래서 외교도들은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좋아하고 고통을 찾는 종교로 오해하기도 했었다. 그리스도교는 절대로 고통의 종교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거나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고통을 변화시켜 기쁨으로 만들고 고통을 보람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해 가치있는 것으로 또 인간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고통을 보람있고 가치있는 것으로 또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비법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며 사랑하는 자를 위해 받는 고통은 오히려 더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정이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들의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해서 투쟁하여 왔고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것이다. 사랑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사는 그 자체가 고통이되고 말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받고 죽으신 그분을 생각하고 본받으려 하고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그분의 감정에 더 가까이 할 수 있고 그분의 생각에 더 접근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기쁜일이냐 말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다가 받는 고통은 인간을 더욱 인간화하며 고해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상낙원속에 살게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명심해야 하겠으며 또 부활의 신비는 바로 고통을 사랑으로, 참된 기쁨으로 변화케하는 신비임을 우리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이 사순절동안 자주 묵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