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들어 소련과 중공등 공산권 국가들은 그들의 개방정책에 따라 주교·신부 등 일부 성직자를 석방하고 닫혔던 성당문을 하나 둘씩 열고 있다. 그렇다면 공산권국가들의 교회에도 과연 봄이 오는 것일까. 이들이 내비치는 종교자유의 일부 허용정책의 진의는 무엇일까. 이와 함께 극도의 무신론주의인 공산주의 치하에서 박해와 회유를 무릅쓰고 교회는 어떻게 유지되어 왔을까. 이같이 공산권 국가들의 일련의 종교문제와 관련해서 적지 않은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으며, 또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 뿐 아니라 무역교류 등 실질적인 경제협력도 추진되고 있는 만큼 어느 때보다 이들 나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이들 나라의 가톨릭 교회의 전반적인 현황을 나라별로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이번회에는 전체적인 개황을 소개한다.…◇
공산권 국가 가운데 소련을 제외한 동유럽 국가들의 가톨릭 교회는 한마디로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사람들이 인식하고있는 것보다는 「건재」하다.
신자수만 보더라도 1억 2천만인구 중 절반인 6천만명이 가톨릭 신자이다. 폴란드같이 전인구의 90%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나라도있다. 신앙심도 대체로 깊다. 주일미사 때 텅비는 서구교회와는 달리 동구교회는 신자들로 꽉찬다.
신학교 폐쇄 등 정부의 갖가지 제한정책에도 불구하고 성소자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사제나 수도자 수도 만만치 않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영향하에 공산화된지 40여년이 지났건만 공산정권들은 당시 그들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던 가톨릭 교회를 말살시키지 못했다. 국가에 따라서는 말살은 커녕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약화시키지도 못했다.
현재의 이런「건재」한 상황이 있기까지는 인류문화에 있어 미증유의 시상인 공산주의와 가톨릭의 그야말로「세기의 대결」이 있었고 그결과 완전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침내 공산정부는 가톨릭에 화해의 손짓을 보냈고 교회도 살아남기 위해 제스처를 쓰지않을 수가 없었다.
가톨릭과 공산주의는 처음부터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은 그 유명한 「노동헌장」(Rerum Novarum)을 반포하고 노동자들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썼다.
당시 서구는 자본주의의 폐해로 사회주의가 득세를 하기 시작할 때였다.
20세기초 소련이 혁명으로 공산화되자 종교탄압은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의 영향으로 2차 세계대전 후 공산화된 동구 및 중공등도 한결같이 가톨릭을 탄압하고 나섰다.
박해의 정도는 국민증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나 역사 등에 따라 달랐다.
소련이나 중공등 신자비율이 적은 나라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약한 점을 이용, 가차없이 박해가 가해졌으나 폴란드 헝가리 등 전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에서는 이들의 반발을 우려, 박해의 고삐가 늦추어지거나 그 정도가 약했다. 반면 전인구의 70%이상이 가톨릭신자인 체코에서는 체코 가톨릭 교회가 20C초엽 오스트리아와 독일로부터 독립한 당시 서방 세계와의 유착관계로 인해 반민족적 성향을 띠었다는 이유와 공산화 이후 공산정권에 배타적이었다는 이유로 혹심한 탄압을 받게 됐다.
아무튼 공산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지상과제인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인민의 아편」인 종교는 제 1의 말살대상이란 점에서 똑같았다.
공산주의의 이론적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종교를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외부의 힘이 인간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환상의 반영」이라 보고 「계급사회에 있어서 계급압박과 착취로 인민이 고난을 받는 것은 종교가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가속된다」고 규정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종교관을 답습한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상 종교는 통치계급이 인민의 투쟁정신을 마취하는 도구로 쓰여졌다」며 종교말살에 전력을 기울였다.
오로지 물질만이 인류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유물론(唯物論)과 정신세계와 내세를 중히 여기는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는 애초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과 사상이 극과 극인 가톨릭 신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 공산주의「신앙」은 스며들기 힘들다고 판단, 혁명 시초부터 말살을 버렸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같은 이론적인 상이함 외에 현실적으로도 가톨릭 교회가 위협적인 존재로 비쳤다. 공산당 서기장 교시보다 추기경이나 주교의 강론이 국민들에 더 잘 먹혀들어갔다. 교회는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됐다.
가톨릭 교회는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막강한 조직을 갖고 있어 공산정권은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를 두려워한 것이다.
동구 가톨릭신자와 교회는 모진 박해에도 쉽게 굴하지 않았다. 공산정권이 극도로 좌경할 때는 교회는 지하로 숨었고 탄압의 정도가 약하면 밖으로 나오는 등 종교의 자유를 둘러싸고 정권과 교회 사이에 끊임없는 파워 게임이 벌어졌다.
정부의 억압에 대항하는 교회의 태도는 나라마다 달랐다.
동구 국가 가운데 가장 의연히 대처한 교회는 전국민의 92%를 신자로 포용하고있는 폴란드 교회였다. 현재 신부가 2만여명, 수도자가 2만 5천여명 그리고 본당이 8천개가 넘는 막강한 교세다.
18C 중엽 주위의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열강에 의해 분할, 제 1차 세계대전 후 독립될 때까지 폴란드 국민은 오랫동안 나라없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고 그때마다 국민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뭉쳐 민족성을 지켜나갔다.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존경을 받으며, 민족과 운명을 같이해온 교회를 「중과부적」인 공산주의자들이 마음대로 요리할 수는 결코 없었다. 특히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에 선출되고 1979년 이래 3차례에 걸쳐 조국을 방문한 이래 폴란드 국민의식 속에 가톨릭 교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또 1980년 여름 바웬사를 지도자로 전국민적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 되었던 「솔리데리티」(연대)운동이라는 독립노조운동은 가톨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결국 폴란드교회의 「분투」로 인해 폴란드 야루젤스키 정권과 교회는 교회가 다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채 정권은 교회를 더 이상 탄압하지않고 교회도, 사회주의 체제에 협력한다는 기본조건 아래 타협이 이루어진 상태.
폴란드 회의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교회는 폴란드에 비하면 훨씬 옹졸하고 정권에 대해 타협적이다.
일반적으로 폴란드와는 달리 이들 국가들의 가톨릭 교회는 반체제의 중핵으로 되어있지 않다.
전국민의 70%를 신자로 포용하고있는 체코 가톨릭 교회는 공산화 초기인 1950년대초 대다수의 주교·신부를 비롯 1만 2천여 수사 중 8천여명이 일시에 체포 투옥되는 등 흑심한 탄압을 받고 교회는 조직적으로 대항할 힘을 잃었다.
채찍과 함께 정부는 성직자 급료와 교회운영비 보조 등의 달콤한 당부를 교회 앞에 내놓았다.
이를 수용한 교회는 당연한 결과로 교회측의 자유재량권은 적어지고 일부 지식인이나 의식있는 신자들의 불만의 소리가 높았다.
50년대 후사크정권은 한술더 떠 체코가톨릭을 바티깐과 단절시키고 교회분열을 꾀하기 위해 가톨릭 성직자 평화운동(MHKD)이라는 중공의 「애국교회」와 유사한 어용단체를 만들었다.
전성직자의 10%에 달하는 이 단체소속 신부들이 정부와 교회의 요직에 앉아 종무행정을 도마질해왔으나 대다수 신자와 성직자들은 외면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신자들의 참가를 금지했다.
결국 체코교회는 정부의 집요하고 무자비한 탄압정책과 교회의 지나친 타협적 저자세로, 폴란드와는 달리 정부에 비해 교회가 훨씬 더 많은 양보를 한 가운데 서방세계와의 개방화 시대를 맞고있어 정부와 교회사이의 장래귀추가 주목된다.
헝가리도 전국민의 60%가량이 가톨릭 신자이지만 현재 공산정권과 적당한 선에서 공존이 모색되고 있다.
1956년 자유화를 부르짖은 헝가리 사건 때 교회내부에서도 체제비판세력이 실권을 잡았지만 그것이 실패하고 체제 옹호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정권의 중심부에 들어가자 교회의 반체제운동도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고슬라비아는 티토 대통령이 일찍부터 반소 독자노선을 걸어오면서 사회주의가 어느정도 희석, 전국민의 30%를 차지하는 가톨릭 교회와 큰 알력은 없었는 편. 가톨릭 교회는 오히려 비슷한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동방 세르비아 정교회와의 갈등이 더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세르비아정교도는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는데에 오히려 심리적으로 강한 반발을 보인다고 할 정도.
동독이나 루마니아 등은 가톨릭 신자가 전국민 중 8% 미만이어서 종교문제를 둘러싸고 공산정부와 직접 대결할 정도의 이슈는 적은 편이고 이들 나라의 주요 종교인 개신교나 정교회와 정부의 타협으로 생긴 종교정책에 소극적으로 편승하는 편이다.
한편 소련의 가톨릭 교세에 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1917년 공산혁명 이전에 전국민의 95%가 러시아 정교회 신자임을 생각할 때 지금도 소수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만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내 작은 공화국인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폴란드와 인접한 관계로 공화국주민 3백50만명 가운데 70%가량이 가톨릭 신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리투아니아 가톨릭교회에 대해 소련은 소수민족보호와 그들의 연방제강화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탄압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러시아 정교회는 민족종교지만 사회주의 체제유지에 큰 위협적 존재로 간주돼 정부는 혁명초부터 흑심한 탄압을 가했다. 또한 대부분의 성직자들을 시베리아로 유형보내거나 투옥하고 5만여개의 교회를 페쇄하고 음악당 등으로 사용해버렸다.
그러나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이래 그의 개방정책(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 따라 투옥한 성직자를 석방하고 성당문을 하나 둘 여는 등 종래 취해오던 억압적 종교정책에 다소 변화를 보이고 있어 그 진의가 주목된다.
중공 역시 66년 이념적으로 급좌경화한 문화혁명과정에서 전보다 더욱 흑심하게 가톨릭을 비롯한 제종교를 탄압했으나 최근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몇가지 기본원칙을 정해놓고 제한적이나마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있다.
지난 81년 이후 약 4천여개의 교회와 성당이 문을 다시 열었고 지난 1월 5일에는 30년간 투옥됐던 상해교구 쿵주교가 석방 복권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은 오랫동안 중공가톨릭이 바티깐과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강압 회유해왔으며 심지어 「애국교회」라는 사회주의 체제에 충성하는 어용교회를 만들어 가톨릭교회의 자체분열을 야기시키고 있다.
현재 중공에는 3백만으로 추정되는 애국교회 소속 신자와 그와 비슷한 수의 로마가톨릭 신자가 있다. 또 1억명의 불교신자와 1천 4백만의 이슬람교 신도 및 4백만의 개신교 신자가 있어 중공이 개방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이들 종교세력들이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소련과 중공 및 동구권 국가들은 최근들어 투옥된 성직자를 석방하거나 성당을 개방하는 등 종교에 대해 다소 자유를 허용하는 추세에 있다.
공산정권들이 애초부터 그들의 이념적 적이라 치부해왔던 가톨릭을 비롯한 제종교에 대해 이 같은 유연한 자세를 가지게된 데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부분 공산국가들이 공산화된 이래 40여년간 종교말살을 시도해왓으나 종교의 속성상 결코 소멸되지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하면 할수록 견고해지며, 종교세력이 점차 강하게 대두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같은 종교의 속성을 예의주시, 차라리 어느정도 종교자유를 허락함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다소 해소시키고, 또 이와 함께 이들의 협력을 얻어 공산두의자들의 궁극목표인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는 이른바 「통일전선전술」을 수립하기 위함 때문이다.
셋째, 신앙의 허용은 사회주의 집단경제체제의 모순타개에서 비롯한 일련의 개방정책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로 분석되고 있다.
부족한 기술과 경험을 서방세계로부터 들여오기 위해서는 서방세계에서 높은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도 다소 인정, 개방의 제스처를 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사회주의체제 자체가 종교와 같이 다소 신비주의적인 문화체계를 필요하게 됐다는 점이다.
소련당국은 청소년들이 더 이상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많은 지식인들은 딱딱한 사회주의 문화에서 신선한 충격과 지식을 얻기 위해 성당이나 교회를 기웃거린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회주의 사상에 열증을 느낄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여건의 변화로 종교에는 봄바람이 불고 있으나 그것이 제비를 불러들이고 개나리를 피게하는 완연한 봄은 결코 예상하기 힘들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중공은 80년대들어 헌법등에 종교의 자유를 성문화시키고 있으나 「애국」과 「3自」(행정의 자립, 경제의 자활, 전도의 자주)의 원칙하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면 미사는 주일만 할 수 있고 외국교회, 특히 바티깐과는 일절 관계를 맺지못하며 18세미만의 청소년에게 신앙교육을 하지 못하는 것 등이다.
이 같은 「종교의 자유」속의 제한은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크게 봐서 대동소이하다. 그들에게 종교는 어디까지나 소멸의 대상일 뿐이다.
결국 공산권 국가들은 신자들에게 충분한 신앙자유의 권리를 주지않고 있으며, 그렇다고 종교를 소멸시키지도 못하고 단지 얼마간 통일전선전술과 선전효과를 노리고 그들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 뿐인 것이다.
이러한 공산정권의 기본적인 종교정책 아래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기위해 무수한 순교자를 내며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서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당국의 정책에 말려 타협하는 부류가 생기기도 하고 아예 「독자적인 가톨릭」으로 변질하는 등 각양각색의 교회상이 포출되는게 오늘날 공산치하의 가톨릭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