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이윤자 칼럼] “성인조상 뵐 면목없어요”

이윤자 <취재국장>
입력일 2017-07-19 16:00:40 수정일 2017-07-19 16:00:40 발행일 1992-09-20 제 182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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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이러했을까. 미리 예견된 풍경이기는 했지만 지난 나흘간 우리의 이 좁은 국토는 극심한 모살을 앓았다. 국토 자체가 유난히 비좁은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극심했다. 마치 현대판 유목민족의 이동을 연상케 했던 한가위 휴가기간이었다. 이 주구상에 이처럼 처철한 교통전쟁을 치르면서 조상과 부모를 찾아뵙는 민족은 아마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서 부산까지 최고 26시간이 걸렸다는 소식도 들리고 아예 고속도로변에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어 식사를 하는 모습도 뉴스에 실렸다. 세계적인 토픽 뉴스감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소재였을 것이다.

고향을 찾아 줄지은 사람의 물결은 어찌보면 한국민의 뜨거운 정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대로 좋을수가 있다. 모처럼 얻은 휴가의 절반 이상을 길기리에 쏟아 붓는다해도 마냥 기쁨에 들떠있는 귀향객들의 표정은 어쩔수가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이번 한가위를 통해 우리는 이땅의 민족이 서울도, 서울로만 모여들고 있다는 심각한 수도권 인구집중 현상을 다시 한번 목격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미 알고있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이었음을 뿐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전 국토가 서울화 될지도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조차 들기도 했를 정도였다.

만일 지방의 각 도시가 골고루 발전하고 지방대학을 나온 인재들이 유수한 기업체에 철커덕 합격할수만 있었다면 과연 전체인구의 4분의 1이 서울로 모여든 기현상이 벌어졌을까. 만일 지방의 인재들이 죽어라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감행했을까.

아니, 유수의 기업체들이 지방에 고루 산재해 지방의 인재들을 그자리에서 흡수할수만 있었다면 과연 서울의 인구가 1천만을 넘어 인구수로는 세계 수위권에 드는 도시로 기형적 발전을 할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있는 서울인구의 폴발적 증가현상은 참된 정치가 실종된체 눈앞가림에만 급급해온 우리 정치의 어쩔수 없는 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주제는 서울 인구의 기형적 증가현상이 있는 유수의 기업체를 지방으로 옮기라는 얘기도 아니고 지방의 대학들을 하루아침에 유명대학으로 바꾸어 놓으라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조상을 찾아 민족의 대 이동을 감행하는 놀라운 효심을 지켜보면서 신앙조상에 대한 우리의 효심을 한번쯤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해준 신앙의 선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한번쯤은 꼭 기억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가 놀랄만큼 신앙의 역사를 갖고있다. 한국의 신자들은 물론 세계교회의 유명인사들까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 한국교회의 창립기원의 역사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역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얼마나 극적인 것인지를 바로 한국천주교 2백주년을 지내면서 배웠다.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학문연구를 통해 씨가 뿌려진 교회라는 사실은 우리교회가 갖는 자랑스러움의 극치라고 할수있다. 한국사회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일단의 선각자들이 학문이라는 연구과정을 통해 스스로 발견한 참 신앙의 길은 세계교회의 역사상 한국만이 갖고있는 특히함이 아닐수 없다.

놀라운 신앙의 역사, 선조들의 고귀한 신앙을 자랑하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는가. 그분들의 신앙의 깊이를 따르려는 결심을 해왔는가. 솔직히 표현한다면 개인은 개인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를 못했다. 우리 신앙의 조상으로 그분들을 받들고자하는 의지는 희박하기만 하다.

성인탄생 10주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건만 우리는 그분들을 너무나 모르고있다.

후손인 우리가 잘 모르는 성인을 남이 알수 없음은 당연하다. 우리가 잘 모시지 못하는 조상을 남에게 알아달라고 바랄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시대에 탄생한 성인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 후대가 그들을 모를것은 뻔한이치다. 대를 물림할수록 이질감의 감도는 물론 더할것이다.

세계 교회사에 빛나는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자랑으로만 그친대서야 어디 말이되는가. 그 자랑이 내 삶속에 용해되 거듭 새로와 지지 않는다면 자랑은 더이상 빛을 발휘할수가 없다. 그분들의 삶을 구현화 시키려는 화끈한 시도가 이젠 필요할때가 되었다. 「한국 성인의 날」같은것도 좋을 것이다.

혹자는 행사가 없어 공경을 못하는가 반문할수도 있다. 그도 맞는 말이다. 돈도 필요하고 그밖에 여러가지가 요구되는 행사는 오히려 낭비가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분들을 더이상 역사속의 인물도, 우리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도록 버려두지 않으려면 우리의 선택은 어떤 모양이든 필요한 것이다. 신앙선조들의 삶을 닮고자 하는 선택말이다.

한가위날 우리가 보여준 엄청난 귀향전쟁은 우리 스스로에게 몇가지 의문을 남겨주었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달해준 조상과 부모를 찾기위해 하루종일을 길에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반면 영원한 생명을 알게해 준 신앙 조상들의 생일을 까맣게 잊고 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번 추석은 유난히도 우리 신앙 선조들을 뵐 면목이 없는것 같다.

이윤자 <취재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