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8월 교회력ㆍ성인성녀 축일 안내

입력일 2017-07-07 15:16:48 수정일 2017-07-07 15:16:48 발행일 1992-08-02 제 181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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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일표

1일 (土) 성 알풍소 주교학자 기념

2일 (日) 연중 제18주일

4일 (火) 성요한 비안네사제 기념

☆6일 (木) 주의 거룩한 변모 축일

8일 (土) 성 도미니꼬사제기념

9일 (日) 연중 제19주일

☆10일 (月) 성 라우렌시오부제 순교자 축일

11일 (火) 성 글라라 동정기념

14일 (金)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사제 순교자기념

☆15일 (土) 성모승천대축일

16일 (日) 연중 제20주일

23일 (日) 연중 제21주일

☆24일 (月) 성 바르톨로메오사도축일

25일 (火) 성 루도비꼬 사제

27일 (木) 성 모니카 기념

28일 (金) 성 아우구스티노주교학자 기념

30일 (日) 연중 제22주일

■ 요한 비안네 사제기념

사제들의 주보인 비안네성인(1786~1859)은 프랑스 명리용 근처 다르디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사회불안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비아네성인은 라루브즈에 있는 르지의 묘소참배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소를 결심했다.

1811년 비안네성인은 바리에르의 소신학교에서 철학과 1813년 리용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라틴어 때문에 퇴학당했다.

그러나 18세때부터 비안네성인은 에퀼리의 아베 발레신부의 지속적인 개인교수와 특별시험 주선으로 1815년 그레노블교의 지도신부들은 그의 선함과 상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한다

비안네성인은 1818년 아르상 동브에서 사목생활을 했는데 종교심이 부족한 그 마을을 성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비안네성인의 명성은 고해성사에 있었는데 프랑스 전역과 외국으로부터 각계각층에서 고해성사를 위해 그를 방문하여 1855년까지 그의 고해자들은 연2만명에 이르렀으며, 만년에는 하루에 16~18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냈다.

■ 주의 거룩한 변모축일

공생활이 끝날무렵 주님께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타볼산에 올라 갔을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과 주님의 권능과 재림을 드러낸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초대교회때부터 교회는 신자들이 예수그리스도와 또 그의 복음에 대하여 견고한 신앙을 갖도록하기 위해 이날을 큰 축일으로 정해 지내왔다.

우리는 사도들이 주의 거룩한 변모를 보고 항상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 영광을 보고 자했던 태도를 상기해야겠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주의 위대하심을 직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행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세상에서의 잠시의 고통을 참고 인내할 수 있어야하겠다.

■ 성 도미니꼬 사제기념

도미니꼬수도회의 창립자인 도미니꼬성인(1170~1221)은 이탈리아 칼라루에카 출신으로 14세때 팔렌치아에서 공부를 시작, 1199년에 고향교구의 오스마대성당 참사회원이 되었으며 당시 위세가 등등하던 이단 알비파를 축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도미니꼬성인은 알비파를 개종시키는데 헌신하고자 1214년 도미니꼬수도회를 조직했으며 기존 수도회칙 중 하나를 채택할 조건으로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그뒤 도미니꼬 성인은 이탈리아, 스페인, 파리등지로 여행하며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1220년 불로냐에서 열린 제1회 수도원장총회에참석하였다.

1221년 헝가리의 이교도들을 개종하기위한 여행중 병사하였으며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9세에 의해시성되었다.

도미니꼬성인은 열성적인 설교가였으며 조직과 통솔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15세기말 묵주의 기도와 단체들의 활성화로 그에 대한 공경심은 더욱 커졌다.

■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로마의 7명의 부제중 한사람으로 258년 발레리아누스황제 박해 때 교황 식스토2세와 4인의 부제가 참수당한지 4일 뒤 다른 4명의 성직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순교 전 로마시의 제독이 그에게 교회의 보화들을 양도하라고 명령하자 그는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제독 앞에 모아놓고「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4세기 초반에 이미 성인축일표에 올랐으며, 로마시의 가장 유명한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성벽밖의 성 라우렌시오 바실리카」는 로마의 7개 주요 성당들중의 하나로서 많은 순려자들이 찾는 곳이다.

■ 성녀 글라라 동정기념

글라라회의 창설자인 글라라 성녀(1194~1253)는 1212년 아씨시의 성프란치꼬의 설교에 감동되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수녀가 되었고 프란치스꼬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다른 여성들과함께 산다미아노에서 글라라회를 세웠다

글라라회는 1215년 대수 도원이 되었으며 글라라 성녀는 세상을 떠날때까지 원장을 지냈고, 1255년 교황 알렉산더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순교자 기념

1894년 태어난 레이몬드콜베(수도명을 갖기전 이름)는 17살되던 해인 1911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에서 유기서원을 하고 1914년 종신서원을 했다.

1917년 원죄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고 미국ㆍ일본 등으로 기사회를 조직해나갔다. 1918년 사제로 서품되고 이듬해인 19년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후 모국인 폴란드로 귀국, 교수생활을 한 후 기사회의 운동을 보다 폭넓게 하기 위해「원죄없으신 성모의기사」월간 잡지를 1923년 창간했다.

이 잡지는 경이로운 성장을 거듭해 1939년에는 1백만부라는 정기 간행물인 잡지 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콜베성인은 1941년 나찌에 체포된후 악명높은 아유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여기서 다른사람을 대신하여 아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보름동안 굶주렸던 콜베 신부가 죽지않자 수용소당국은 독약주사로 그를 죽여 버렸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베 신부를 성인품에 올렸다.

■ 성모승천대축일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서의 생횔을 마친후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올라갔음을 기념하는 축일로 성모승천은 초기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를 믿어왔으며 1950년 11월1일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믿을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승천은 비록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초대교회부터 내려오는 믿을만한 전승과 구세사에 있어서 성모의 역할, 그리스도와 성모와 관계, 교회 안에서의 성모의 위치등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적 결론이다.

성모승천에 대한 최초의 전례적 축일의 날짜나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3~4세 부터순교자나 성인들을 그들의 사망일에 기념하는 사상에 부응하여 4세기 중엽의「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의 죽음과 승천의 축일로 받아들여진듯하다.

7세기경 동방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축일이 지켜져 서방으로 전해졌으며 8세기에 8월 15일로 날짜가 확정되고 명칭도「마리아의 승천」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이 날은 마리아축일중 가장 중요한 날로 교회전례력에 있어 가장 큰 축일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날은 의무축일로 지내고 있다.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지낸후 갈릴레아로 향하던 도중에 3번째 제자로 뽑힌 필립보의 권유로 예수를 뵙고「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요한2, 49)라고 고백한 나타나엘이 바로 바르톨로메오 성인이다.

역시가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성령강림 후 고국을 떠나 멀리 동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성대한 교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성격이 순박하고 정직한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주의 부르심에 응하여 사도의 반열에 들자 일생을 진리를 위하여 바치고 투쟁하였다.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기념

히포의 주교며 학자인 아우구스티노 성인(354~430)은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출신으로 모친 모니카의 돈독한 신앙 속에서 성장, 카르타고대학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당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교를 떠나 정신적 방황을 하였으며 15년간 지속된 방탕생활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384년 수사학교사로 로마에서 밀라노르 이주 성 암브로시오와의 해후와 그의 영향, 신틀라톤주의와 성 바오로에 대한 독서를 통해 회두, 387년 부활전야에 세례를 받았다.

388년 타가스테에 수도원을 세우고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규칙을 만들었다. 391년 발레리우스 주교로 부터서품을 받고 수도원생활을 계속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곧 아프리카 교회문제의 중요인물이 되어 395년 발레디우스의 보좌주교를, 396년부터 사망때까지 그곳 주교를 지냈다.

사제생활중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도나투스이단ㆍ펠라지우스이단ㆍ마니케이즘문제와 대결, 이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였다. 교회와 성사, 성사적 은총 등의 문제와 관련된 교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이를 통해 서양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중세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철학의 전내용과 서양신학의 모습을 결정짓게 하였으며, 개종까지의 자서전인「고백록」과 로마가 알라릭에 의해 함락된 이후 최초의 역사철학서인「신국론」등의 대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