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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감방(監房)에 버려진 성경책

김종원<안양교도소 보안과>
입력일 2017-07-03 21:11:47 수정일 2017-07-03 21:11:47 발행일 1992-07-26 제 1815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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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낡은 성경책이 한 권 있다. 낡았다는 의미는 발행된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너무나 많이 읽었기에 책장이 낡아있다는 뜻이다. 손이 많이 닿은 곳에는 책장이 닳아있고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있다.

또 군데군데 붉은 색으로 밑줄친 부분이 많다.

성경은 모두 귀중한 말씀으로 엮어져 있지만, 그중에도 읽는 이의 마음에 진한 감동으로 와닿는 말씀에는 밑줄을 그어 놓은 모양이다. 주로 인간이라면 지켜야 하는 윤리도덕과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병으로 아플때 인간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속죄와 위로를 주는 부분에는 모두 밑줄을 그어 놓았다.

나는 이 낡은 성경책을 청송교도소의 한 감방(監房)에서 발견했다.

이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던 재소자는 오직 깊은 믿음으로 성경책을 많이 읽은 것이 분명했다. 어느 신앙간증수기에는 5년동안 성경을 1백87번이나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재소자는 정확하게 몇번 읽었는지 모르지만 그에 버금가는 횟수로 봉독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이 성경책은 1980년 3월25일(15판)에 대한성서공의회에서 공동번역으로 펴낸 성경(가톨릭용)인데 마분지(馬糞紙)로 된 표지가 너덜너덜 떨어져 있었다. 나는 봉제 공장으로 가서 천으로 책표지를 만들어 끼웠더니 겉으로 보기엔 깨끗한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 성경책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밑줄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다.

책장이 닳도록 오래동안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던 성경책이므로 정도 많이 들었을텐데 왜 버리고 갔을까?

원래 청송교도소에서 본형(本刑)의 형기가 끝나면 제1보호감호소로 넘어가게 되어 있는데 그 당시 제1보호감호소가와 제2보호감호소의 수용실정이 포화상태라서 청송교도소에서 넘겨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청송교도소의 일부시설을 임시로 보호감호대용시설로 정하여 감호자를 수용하고 있었다. 얼마후 감호소의 과밀수용상태가 어느 정도 완화되자 한꺼번에 감호자를 제1보호감호소로 이송시킨 적이 있었다. 감호자들이 모두 떠나고 이들이 사용하던 감방에서 별의별 잡동사니가 다 쏟아져 나왔다. 그 쓰레기더미 속에서 나는 이 성경책을 발견했던 것이다.

보통 독방에 갇혀 있는 재소자들은 정식적으로 제가 많은 자들인데 성격이 포악하거나 편협하여 지나친 이기주의와 반항심에 젖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닦으라고 성경책을 넣어 주면 책을 찢어버리거나 온 벽면에 도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성경책이 수난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을 많이 겪은 나는 얼른 쓰레기 속에 묻혀 있던 그 성경책을 집어들었다.

쓰레기장으로 직행할 신세에 놓여 있던 그 성경책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찢어진 것이 아니고 책장은 온전했다.

자기 돈으로 성경책을 구입했다면 이렇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버릴 수 있을까? 이 재소자도 천주교 종교단체에서 기증한 성경을 공짜로 얻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쉽게 버리게 되는 것이리라.

소중한 성경이 마치 선거철에 길거리와 아파트계단에 밟히는 입후보자들의 웃고있는 얼굴사진이 있는 선거홍보물 같은 신세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敬畏心)과 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어찌 성경책을 함부로 버릴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성경책을 버리고 간 재소자가 믿음이 부족했다고는 단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또 감호소로 넘어가면 누군가가 새 성경책을 가져다 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낡은 성경책을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성경책」을 버리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원<안양교도소 보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