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인물] 개소 10년만에 자체건물 마련한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진소 신부

입력일 2017-06-04 10:46:48 수정일 2025-07-30 09:14:38 발행일 1992-05-10 제 1804호 10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교회사에 폭넓은 관심필요” 
초기 교우촌 답사만 4백여곳 
사제관 겸한 60평규모의 반양옥 
답사땐 곳간서도 자며 굶기 일쑤
지난 4월중순 완공된 호남교회사연구소.

『부족하나마 이만한 집이라도 생겼으니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연구에 몰두할 생각입니다』

호남교회사연구소가 문을연지 올해로 꼭 10년. 우여곡절끝에 자체 연구소건물을 마련한 소장 김진소(대건안드레아ㆍ53) 신부는 아직 풀지도 않은 이삿짐들을 옆에 두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연구소라고 해야 60평 남짓한 반양옥에 그것도 절반은 김신부가 생활을 사제관이고 나머지 30평만 연구소로 이용되지만 그간의 고생에 비하면 감지덕지라고 김신부는 말한다. 별도의 연구소가 마련된 이유도 있지만 교회사연구외에 다른 보직에서 해방(?)된 것도 김신부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는 그동안 이름만 있었을뿐 사실상 김신부가 보직에 따라 옮겨가는대로 따라다닌 꼴이었다. 82년 12월 개소하면서 김신부가 교구 학생관장직을 맡았을때 연구소는 김신부의 숙소인 가톨릭사회복지회관 4층에 자리잡았다. 87년 천호피정의 집 관장으로 발령나자 천호성지ㆍ피정의 집관리에다 교회사연구소까지 3중의 짐을 떠맡았다.

물론 연구소도 피정의 집으로 옮겨왔다. 이후 교회사연구를 위한 별도의 건물이 필요함을 교구에 요청해오다 지난해 어렵사리 승락을 받아내고 11월중순 공사에 착수, 6개월만에 결실을 보게된 것이다. 교회사연구에 대한 김신부의 끈질긴 집념의 결과였다. 김진소 신부는 본인은 교회사를 전공한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이 작업에 뛰어든데는 그의 말대로라면 섭리 혹은 운명이란 것이 작용했다고 한다.

72년 7월 5일 서품후 열달만에 교통사고로 나흘만에 깨어났을때『은혜로 건져진 잉여인생이 무얼해야 신명에 보답할까』궁리하다 마주친 것이 교회사였다. 여기에 신학교시절부터 가져왔던 역사에 대한 관심이 한몫을 했다. 김신부는 신학교졸업논문 주제로 「중국고대 현인들과 이스라엘예언자들의 사상비교」를 택했었다.

그때부터 무슨 역마살이낀것처럼 역사의 현장을 뛰어다니기를 10여년. 그가 논산ㆍ부여ㆍ진안 등 초기교회 신자부락을 확인하며 답사한 곳은 4백여군데에 이른다. 하루 보통 산길 50여리를 걷는 강행군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는 예사였고 요행히 신자집을 찾으면 가족들이 지내기도 비좁은터라 곳간에서 새우잠자기가 일쑤였다. 어떨땐 길거리 짚단에 앉아 깜박졸다 밤을 세운 적도 있었다.

78년 2월,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이 진산(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전주로 압송되던 현장을 답사할때다. 「용계원」고개를 넘어오다 간첩으로 오인한 주민들의 신고로 잡힌적이 있었다. 짐속엔 카메라ㆍ나침반ㆍ지도ㆍ칼 등이 들어있어 변명의 여지도 없었고 신분증을 보여주며 천주교 신부라고 설득해도『간첩이 신분증이 없겠느냐』며 되레 반박만 당했다. 2시간 넘게 실랑이하다 겨우 풀려났지만 이와 비슷한 경우는 수도없이 겪었다. 그러나 김신부는『이런 고생중에 순교자들의 고통을 만분의 일이라도 체득할 수 있었다』며 오히려 감사해한다. 김신부는 자신의 경험에 비해 요즘은 일할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큰 걱정이다. 교회사연구가 「춥고 배고픈」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사람이 함께 일한적이 있지만 불과 몇달을 못견디고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김신부는 교회의 적절한 재정적 지원과 역사연구에 대한 소신을 가진 젊은이가 무엇보다도 아쉬운 상황이다. 또 토착화에 대한 논의가 한풀 꺾인것 같아 안타깝다는 김신부는『교회안에서도 문화적 식민지와는 분명히 존재한다』면서 교회지도층부터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별도의 운명비도, 후원회비도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할 일 아닙니까?』구교우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구전(口傳)일화집 편찬 등 앞으로 무척 바빠질것 같다는 김신부의 얼굴엔 역사연구에 대한 엄숙함마저 엿보이듯했다.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