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하는 한적한 시골길을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은 나의 마음은 여간 착찹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내가 이대로 학교에 부임해야 하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음의 갈등속에 포장도 안된 길은 나의 마음을 더 서글프게 만들어 주었다. 먹은 점심이 다 올라 올 정도로 흔들리는 시외버스속에서 비릿한 생선 냄새와 시큼 털털한 땀 냄새가 한데 어울려 민감한 코를 더욱 자극 시켜 준다. 하루 종일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발령이 설마 했던 18학급짜리 벽지학교 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 했었던 일이었던가!
어려서 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던 나의 꿈은 한 순간 휘청거리는 좌절이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어둠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은 곧 한줄기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었고 나는 이 벽촌에서 뜻밖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이 된지 불과 2년 밖에 안된 아직도 어수선 하던 시절에 맏딸로 태어난 나는 그래도 부유했던 부모님 덕분에 호화로운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내 성격은 고집 불통에 이기주의며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로 커 갔다.
6살 터울로 두동생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하루 아침에 우리 네 식구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우리가 더 이상 2층 대리석 집에서 살 수 없게 되던 날,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쓰러지셨고 한번 시작된 가난의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는 한번도 제 날짜에 등록금을 내지 못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았다.
모난 돌과 같던 나의 성격은 가난이란 망치로 두들겨 맞으며 조금씩 부드럽게 둥그러져 갔고, 병마와 가난은 인간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모님이 이끄시는데로 대전 대흥동성당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내안에 살아있는 오만과 불신은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잘도 피해 다녔던 것이다.
나는 힘들게 일하며 학비를 마련하여 어렵게 교육대학을 나왔고 그래서 이제 나는 우리 집안에 한줄기 등불로 비춰져 희망을 안고 첫 부임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이름모를 산과 들을 구비구비 돌아 더 이상 주변의 사물을 알아볼 수 없게 어둠이 깔린 뒤에야 조암이란 곳에 도착하였고 내가 근무 할 학교는 그 곳에서도 시오리를 더 가야 했다.
1968년 9월 1일, 나는 그렇게 원했던 교직에 첫 걸음이 전기조차 없고 더 이상 가난 할 수 없는 농어촌에서 시작하게 된 것에 회의와 절망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가난한 자를 사랑하셨고 그들을 통해 구원사업을 이룩하셨다.
성탄절을 한달 남짓 남겨 놓고 어느날, 교직원중에 유일한 신자였던 김선생이 교실로 찾아왔다.
『김선생, 내일 맹곡동공소에 신부님이 오신대요. 우리 저녁 일찍 먹고 공소에 같이 가요』
나는 공소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따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