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극악 무도한 죄수들을 처형하던 사형들이었다.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신명21ㆍ23)이기에 십자가는 저주와 멸망 모욕과 수치,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되었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의 목적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 갔음을 느끼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왕을 보려고 했으나 결국 사형수를 따라 다닌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왕이었음은 십자가의 죄목 명패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명패에 적힌 죄목은 INRI(Iesas Nazarenus Rex Iudeorum) 즉 「유다인의 왕 나자렛예수」였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신앙 고백 이었다.
메시아 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가 구원 되었기에 저주와 멸망이라는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 졌다. 이제는 십자가가 사랑과 헌신, 순종과 생명, 봉헌과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멸망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그것이 곧 하느님의 힘이기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Ⅰ꼬Ⅰ,18ㆍ23)이고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6ㆍ14)고 했던 것이다.
십자가는 사랑과 헌신의 상징이다. 십자가에 예수님의 생애가 요약 되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사랑 때문 이었다. 십자가로 인한 구원은 고통의 대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류에게 헌신한 사랑의 댓가이다. 예수님은 왕이었지만 세상의 왕처럼 자기 대신 남을 죽게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기가 죽었고 인생의 의의를 자기의 권세나 안락에다 두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데 두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치고 남김 없이 자기를 내어준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펼쳐진 예수님의 양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 활짝 펼쳐진 양팔은 인류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포옹의 모습이고 아낌없이 주는 형제애의 자세였다. 십자가는 사랑에 의한 자신의 개방 이었기에 그 결과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인간을 하느님께로 되돌아 오게 한다. 십자가는 수직으로 하느님 사랑과 수평으로 이웃 사랑이 만나는 장소인 것이다.
십자가는 순종과 생명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2ㆍ8) 예수님은 죽음의 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고통의 십자를 싫어 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순종했다. 결국 아담은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써 생명 나무에서 죽음을 가져 왔지만 제 2의 아담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죽은 나무에서 생명을 가져 왔던 것이다.
십자가는 우주적 제사 의식으로서 봉헌과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상 제사는 성전이라는 인위적 무대에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무대로 온 세상이 볼 수 있는 골고타 언덕에서 바쳐졌다. 예수님은 생전의 휘장을 거쳐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휘장을 거쳐 참다운 지성소인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예수님이 운명 하시자 성전 휘장이 두폭으로 찢어진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 되었던 구약의 구원 제도가 끝났음을 뜻하며 지성소에서 대사제만이 만날 수 있었던 하느님을 인간 이면 누구나 만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제물로서 동물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봉헌 했다. 예수님은 해방을 위해 빠스카 어린양이 회생 되었던 것처럼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우리의 몸 값을 치르고 우리 대신 노예가 되어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 하셨다.
십자가는 신앙과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城)안에서가 아니라 성 밖에서 죽으셨다. 즉 그분은 아웃사이더(outsider)로서 버림받은 상태에서 운명 하셨다. 그런 상태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22ㆍ1,마르15ㆍ34)라고 부르 짖으셨다. 이 부르짖음은 모두가 이제는 하느님이 없다고 조롱하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찾는 신앙의 절규였다. 이 절규는 하느님이 자기를 버린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하느님이 침묵을 지키는 고독한 순간,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순간에도 끝까지 하느님을 찾고 자기 생존을 오로지 하느님께 심는 모습을 보여준다.
십자가로 인류가 구원 되었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는 떨어질 수가 없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고통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막바로 기쁨의 부활을 누리려고 하지는 않는지! 십자가를 피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려는 태도는 참 삶의 태도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현세의 부귀 영화 만을 추구 한다면 이 세상의 현명함을 택한 것이 되고 말아 십자가가 참을 수 없는 수치와 어리석음으로 보여 신앙을 내 팽개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까9ㆍ23)고 했으니 우리는 고통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기에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도처럼 구원으로 인도하는 복된 것이 되기도 하고 좌도처럼 멸망으로 인도하는 불행한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하느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순종과 사랑과 믿음에서 우러난 행위로 만들 어야 겠다. 그 때 비로소 고통은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들어주는 약이 될 것이며 십자가(十)는 우리에게 더하기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