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와 동아대 법학연구소·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가 주관하는 사형제도 긴급토론회가 지난 26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지난 2월 25일 헌재의 사형제도 합헌 판결과 이후 이어진 사형집행재개 논란으로 ‘사형제도’가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이날 ‘헌법재판소 결정분석 및 사형제도와 범죄억지력의 관계’를 주제로 한 긴급토론회는 사형제도 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회는 정미화 변호사(법무법인 남산 대표)가 맡았으며 힐튼 안토니 데니스 주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가 기조발언을, 허일태·홍기원·한인섭 교수가 각각 주제발표를 맡았다. 이 밖에도 조성애 수녀(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후안 레냐(주한 스페인 대사)·김부겸 의원(민주당·리처드 커윈(주한영국대사관 정치담당 서기관)·오동석 교수(아주대 법학전문대)·금태섭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호중 교수(서강대 법학전문대)·이영우 신부(서울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한기찬 변호사(법무법인 신촌) 등이 참석해 사형폐지를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기조발언과 주제발표를 요약한다.
■ 기조발언 : 힐튼 안토니 데니스(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 범죄 근본 원인 해결에 초점 맞춰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형제도는 살인자, 성폭행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원칙적 수단으로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17년 살인범죄에 대한 사형이 강제화됐고, 1948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분리정책)가 도입돼 이에 대한 사형선고가 확대됨에 따라 당시 남아공은 사형집행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가 됐다.
그러나 1992년 사형집행은 중지됐고, 1994년 민주적인 남아공이 탄생했다. 1995년 ‘사형제도가 특정 헌법적 권리들을 침해한다’는 내용의 ‘국가 대 MAKWANYANE and MCHUNU’ 사건으로 사형제가 위헌이라는 헌재의 판결이 났고, 남아공은 사형폐지국이 됐다.
초점은 사형제도의 범죄억지력이 아니라,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고, 범죄와 싸울 경찰의 역량을 더 쌓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 4월 27일 민주화 16주년을 기념하는 남아공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하겠다.
“여기에 모두를 위한 일과 빵, 물과 소금이 있게 하라…자유가 다스리게 하라…영광스런 인간 승리의 태양이 다시는 지지 않을 것이다. 신이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 연설 중에서 -
■ 주제발표 1 :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합헌 결정에 대한 헌법 분석 - 허일태(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사형폐지운동협 회장) 사형제 합헌 판결은 모순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25일 사형제도의 위헌성 여부에 대해 세 가지 근거로 합헌결정을 내렸다. ▲우리 헌법은 사형제도를 예상하고 있고 ▲형벌로서 사형은 우리 헌법상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금지규정에 위반되지 아니하며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인간존엄에 대한 불가침은 사형제도를 금지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제도가 헌법상 예상된 제도라는 주장은 헌법의 당해규정(즉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에 한하여 단심으로 할 수 있다. 다만 사형을 선고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110조 제4항 단서)이 사형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형제도는 헌법상 합헌일 수밖에 없다는 해석론에 집착한 결과다. 동시에 형법(하위법)이 헌법(상위법)을 구속하는 논리로서 이는 모순의 극치다.
사형제도가 헌법상 본질적 침해금지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사형제도는 헌법상 비례성 원칙(목적의 정당성·수단의 상당성·피해의 최소성·양 법익간 균형성 및 보충성 원칙)에 위배된다. 윤리적 존재인 국가가 살인을 금지하고 있으면서, 정작 국가 자신은 사형제도라는 형식을 빌려 고의로 살인하는 것을 합법화했다.
사형제도는 인간존엄의 불가침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궤변이다. 사형제도를 비롯해, 인간의 생명과 더불어 신체기능과 완전성, 인간의 핵심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는 언제나 인간의 존엄에 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재는 인간 생명을 박탈하는 사형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세계 197개국 중 사형집행국은 18개국에 불과한 이 시점에, 우리나라가 5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헌법에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가 금지돼 있고, 인간존엄의 불가침과 이를 위한 국가의 책무를 천명하고 있는 국가에서 사형제도가 존치하고 있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극히 예외적 현상임을 감안해, 국회차원에서 절대적 종신형을 대안으로 사형 제도를 하루빨리 폐지해야 한다.
■ 주제발표 2 : 미국 사형제 범죄 억제효과 여부에 대한 법경제학적 동향 - 홍기원(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범죄억지 효과 증명안돼
우리 사회에는 사형제에 대한 다소 감정적인 주장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사법기관과 정치계는 스스로 여론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그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전무한 실정이다.
최근 미국의 사형제도의 범죄억지력 여부에 대한 법경제학적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사형제도와 그 범죄억제효과간의 상관관계를 쉽게 증명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도노휴와 월퍼스(Donohue and Wolfers)는 2003년 이후 발표된 사형제도의 범죄억제효과에 관한 연구 6편의 방법론을 검토한 후 결론적으로 잠재적 범죄자들이 사형에 처해질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또 히얄마슨(Randi Hjalmarsson)은 연구를 통해 잠재적 범죄자가 사형집행을 두려워하여 결국 사형집행이 실시될 때마다 살인범죄가 줄어든다는 가정을 증명해주는 증거는 극히 제한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듀크대학의 필립 쿡(Philip J. Cook)은 사형제도에 드는 비용을 절감해 이를 교육이나 의료보험에 투입한다면 국가경제 차원에서 더욱 균형적인 지출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존 로만(John K. Roman)도 사형제도관리의 고비용성을 지적하면서 사형폐지를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사형제도의 법경제학적 고찰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작지 않다. 사형제도는 정부와 시민으로 하여금 고비용을 부담케하는 비효율적인 형사제재수단이며 범죄를 억제시킬 수 있는 확실한 사건도 아니라는 것을 최근 미국 법경제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형벌의 목적이 단순히 일반예방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 사형제도의 존폐를 논함에 있어 먼저 현대적 형벌의 목적이 무엇인가 다시금 상기하고 사형제도의 본질에 대해 숙고해봐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 주제발표 2 : 사형의 범죄억제 효과 여부에 대한 검토- 한인섭(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소장) 사형은 제도화된 살인일 뿐
최근 몇몇 연쇄살인사건을 계기로 사형집행을 재개하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잇따른 사형재개 발언과 법무부의 사형집행 재개 발언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사형 문제는 우리사회의 인권과 정의실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11년간 사형을 미 집행함으로써 ‘사실상 사형폐지국’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과를 한순간에 뒤집는 사형집행재개 움직임은 전 세계적 사형폐지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며 인권후진국으로의 전락을 의미한다.
사형이란 국가 즉 경찰과 검찰, 법원과 형 집행기관이 저지르는 ‘합법화 제도화된 살인’이다. 국가가 개인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서, 만약 살인하면 그 응징으로 나도 살인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은 공개처형을 했던 군주권의 무기이며 군제제의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국가에 전제군주적 권력의 잔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형제도는 수많은 오판으로 인한 사법살인의 역사를 썼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사건 최창식 공병감은 근무태만과 적전비행으로 총살됐으나 14년 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민족일보 조용수씨는 1961년 5월 18일 영장 없이 연행돼 8월 28일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2008년 1월 16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국 사법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8명이 처형됐으나 2007년 1월 23일 무죄판결 받았다. 이 밖에도 30건이 넘는 오판사건이 2006~2009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거나 법원에 계류중이다.
사형제도는 생명경시 풍조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회갈등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폭력 악순환의 고리로 해결하는 야만적 형벌제도다.
살인범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했다고 그에 대처하는 국가가 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국가는 제도의 운용을 통해 인간의 생명가치를 고양시켜가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