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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쿡인 며느리의 한쿡 이야기] 필리핀 이주여성 베로니카 비라이씨

정리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09-05-12 12:00:00 수정일 2009-05-12 12:00:00 발행일 2009-05-17 제 264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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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잘 해주는 남편  '감동'
베로니카씨 부부와 사랑하는 딸 유진, 민영, 지연이.
창문을 열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로 봄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옵니다. 가슴 한 가득 숨을 들이쉽니다. ‘음, 서울의 냄새!’ 낯설었던 이 공기가 이제는 고향처럼 친근합니다. 한국에 온지 6년, 이제는 한국 아줌마가 된 자신을 느낍니다.

어릴 적 꿈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녀원에 들어가 4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서원을 청하는 제게 하느님께서는 “NO”라고 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는 것을 바라셨어요.

우여곡절 끝에 한국 남자와 결혼하게 됐지만 이것조차도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보라고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해두신 저의 성소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처음 김치를 먹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시어머니께서 “몸에 좋은거란다”하시며 접시에 김치를 올려주셨습니다. 한 조각을 입에 물었는데 입속에 불이 나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김치가 너무도 맛있어요. 김치가 없으면 무엇으로 반찬을 만드나요?

이렇게 조금씩 한국 생활에 적응을 하게 됐어요. 남편의 도움이 정말로 컸지요. 남편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에 서툰 나를 잘 참아주었습니다. 제게 유진, 민영, 지연이라는 예쁜 아이들도 선물해줬지요. 가정에도 충실하고 일에도 성실한 최고의 남편이랍니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고마운 것은, 필리핀에 살고 계시던 엄마를 제가 모실 수 있게 배려해 준거에요.

저는 지금 집 근처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제가 번 돈을 다달이 필리핀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것도 너그럽게 이해해줘요. 우리 엄마에게 용돈도 드리고 좋은 곳에도 모시고 구경도 시켜드립니다. 이런 남편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남편도 저에게 늘 고맙다고 한답니다. 시부모님을 공경할 줄 알고, 형제들에게도 잘 한다고요. 또 제 성격이 활달한 것도 좋대요.

많은 다문화가정 부부들이 다툰다고 하는데 사실 저희 부부는 크게 싸운 적이 없답니다. 서로 의심하는 마음, 너무 많은 나이차, 문화적인 차이 등 싸우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부부 생각은 달라요. 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다툴 일이 없어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이 있답니다.

요즘 저는 정말로 행복해요. 무신론자였던 남편이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거든요. 지난 해 11월에는 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 기리암 신부님 주례로 혼배미사도 드렸어요. 하느님 앞에 당당히 부부로 서게 돼 행복해요. 매주 일요일 온가족이 함께 혜화동 필리핀 미사에 가 기도합니다. 삶의 매 순간, 하느님과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요. 늘 저와 함께 계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지켜주시겠지요? 이 세상에 태어나 너무나 행복합니다.

정리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