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광복절 특집] 탄생 100주년 맞은 ‘광복절 노래’ 작곡가 윤용하를 기억하다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2-08-09 수정일 2022-08-10 발행일 2022-08-14 제 3306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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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 살아내며 신앙과 음악에 몰두한 삶
황해도 구교우 집안 출신
‘공산주의 반대’ 교회 영향 받아
1946년 월남… 음악 활동 펼쳐

식민지 청년의 아픔 노래하고
주일학교 학생 위해 동요 작곡
가난에 시달리다 43세에 선종

태극기 앞에서 지휘 중인 윤용하 작곡가. 출처 「국민예술가 윤용하」(2015)

올해는 광복 77주년이자 ‘광복절 노래’를 작곡한 고(故) 윤용하 작곡가(요셉·1922~1965)의 탄생 100주년이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그의 가곡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윤 작곡가는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음악가로, 생전보다 사후에 재조명되면서 각광받았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굳은 신념과 그의 신앙은 그가 선종한 지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4만 장이 발행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작곡계의 선구자이자, 열정 가득한 신앙인이었던 윤 작곡가의 일대기를 재조명해본다.

가난한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 작곡가

윤 작곡가는 황해도 은율군에서 3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목수 요셉처럼 믿음 깊은 수도자가 돼야 한다”는 그의 외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은율성당에서 ‘요셉’이란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신앙은 어린 시절은 물론 일생에 이르기까지 삶을 지탱하고 방향을 찾아 주는 나침반이 된다. 막걸리를 마시지 않은 날을 손에 꼽을 만큼 술을 좋아했지만, 사순 시기 동안에는 금주를 실천할 정도로 신앙이 굳건했다.

집안은 대대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골짜기를 찾아다니며 은거해야 했고, 그가 태어날 당시에도 아버지는 옹기를 굽고 장에 내다 팔아야 겨우 생계를 이을 수 있을 만큼 가난했다.

그는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해 5학년까지 다니다 생활고로 만주 봉천으로 옮겨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마지막 학력이다.

하지만 가난과 짧은 학력이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과 천재성마저 가리진 못했다. 어려서부터 성가대에 나가 음악을 접했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한 프랑스 신부는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동양을 순방 중이던 교황 사절에게 음악 신부로 키우면 좋겠다고 추천할 정도로 천부적 소질이 있었다. 윤 작곡가 자신도 신부가 돼 교회 음악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평신도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는 성가대에서 프랑스 영사의 부인을 만나 오르간을 배우면서 꿈을 키워갔다. 결정적으로는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 단원이었던 일본인 기네코와의 만남이 있었다. 기네코는 윤 작곡가의 음악성과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이 터득한 화성학과 대위법 등 음악 전문이론을 가르쳐줬다. 그 덕분에 정규교육 없이도 어린 나이에 관현악 편곡까지 하는 기량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이후 그의 음악적 재능은 나날이 발전했다. 19세 때 이미 ‘봉천조선합창단’을 창설하고 ‘늴리리야’, ‘아리랑’ 등 우리 민요를 봉천방송을 통해 전파하며 나라 잃은 동포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고자 했다. 모두가 그를 신동이라고 했다.

일제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경제적 궁핍으로 1943년에는 만주 신경으로 옮겨 ‘재만 조선인 연합합창단’과 ‘백조합창단’을 만들었다. 민족적 색채가 가득한 조선말 노래를 공연하고, 조선 음악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또 ‘신경 가톨릭 성가대’ 지휘자로서 미사곡을 아름답고 경건한 멜로디로 편곡, 지휘했다.

6·25 전쟁 직후 서울. KBS 어린이 합창단과 함께 한 윤용하 작곡가. 출처 「국민예술가 윤용하」(2015)

순수 예술인 윤용하

윤 작곡가는 광복 후 만주 용정사범학교에서 음악 강사로 일하다 아내를 만났다. 결혼 후 그는 함흥으로 발길을 돌려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에 영향을 받아 1946년 아내와 함께 월남했다. 스스로도 자유로운 음악 활동에 대한 열망이 컸다.

서울에 살면서 그의 활동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교향곡 ‘투쟁과 승리’, ‘농촌 풍경’, ‘조국의 영광’을 작곡, 공연을 지휘했다. 1960년에는 자작동요 ‘100곡 발표회’를 서울시 공관에서 열기도 했다. 한국작곡가협회 사무국장, 한양공고·동북고교 교사, 구산후생학교 음악 강사 등을 역임하고 신당동본당과 인천 답동본당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

또한 동료들과 함께 ‘한국 음악가협회’를 발족하고 ‘애국의 노래’, ‘국민의 노래’ 등 국민가요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그의 곡은 격이 높고 소박하며 낭만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중 ‘광복절 노래’와 ‘민족의 노래’는 일제 식민지 말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는 역사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조를 지키려 했던 식민지 청년의 아픔, 그 속에서 솟구치는 해방의 기쁨과 민족애가 잘 나타난다고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윤 작곡가는 이틀에 한 끼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아동문학가 고(故) 박화목 시인(1924~2005)은 “그는 한 번도 영화음악을 쓴 적이 없다”면서 “미련할 정도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순수 예술인이었다”고 증언했다.

1958년 3월 8일. 명동성당을 방문한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에게 인사하는 윤용하 작곡가. 뒤에 서 있는 이는 노기남 대주교.

어린이를 사랑한 가톨릭 음악인

박화목 시인과의 만남은 그의 음악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 시인은 당시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의 문예담당 라디오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었고, 윤 작곡가를 어린이 프로에 동요 작곡가로 기용했다. ‘방송 어린이노래회’가 발족되면서 윤 작곡가는 동요와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6·25전쟁으로 부산 용두산 판자촌에 살면서도 ‘대한 어린이 음악원’을 만들어 수차례 동요발표회를 여는 한편, 서대신성당 옆 빈터에 천막을 치고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쳤다.

한상봉(이시도르) 「공동선」 전 편집장은 창간호에서 윤 작곡가 평전을 다루며 “그가 궁핍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은 것은 어린이다움을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자녀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모르는 주변인이 없을 정도였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대했던 윤 작곡가는 말년에 주일학교 학생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동요를 많이 만들어서 보급하고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당시 어린이를 위한 성가책을 다시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3년 월간지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주일학교 성가 소고’에 그 편찬 요령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뿐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가톨릭 음악계가 처한 문제점들을 본당 지도자들과 가톨릭 음악가들이 함께 뭉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가톨릭 음악가들의 사명을 강조했다.

아동문학가 이석현(세바스티아노) 시인과 함께 ‘가톨릭 소년의 노래’, ‘성당 종’ 등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를 작곡한 그는 주일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숙원사업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43세에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한평생을 단칸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윤 작곡가. 그가 지상에서 산 세월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가 남긴 음악과 신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흔적들은 지금도 사람들 귓가에 남아 있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