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앞 마당에 캠페인 현수막이 일 년 넘게 걸려있다. 성당 건물 외벽 전면에 대형 현수막이 달렸다. 성당 입구로 들어서면 배너 홍보물이 서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옆 벽에는 안내문이 여러 장 붙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제대 양쪽에 현수막이 길게 드리워 있다. 모두 이 본당 설립 몇십 주년 맞이함을 기념하고, 신자들이 실천해야 할 것을 안내하는 홍보물이다. 설립 기념 해를 계기로 대대적인 행사를 통해 의욕적으로 사목하는 듯하다. 성당 안팎, 눈 돌리는 곳마다 같은 홍보문이 보인다. 교우들에게 메시지가 각인되기를 바라는가 보다.
선교나 사목하려면 바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해야 한다. 메시지는 전달한다고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1930년대에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하면 총알이 박히듯,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하듯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커뮤니케이션 이론도 있었다. 이런 일방적 소통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나 전달 하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다. 요즘은 기본적으로 수신자 중심의 쌍방향 소통을 추구한다. 교회에서의 효과적인 소통방식은 무엇일까.
성당은 그 자체가 메시지다.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도록, 설계된 원형 모습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포스터나 현수막을 내걸 때는 장소나 거는 시기를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붙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많이 붙이면, 보여주어야 할 것을 가리고 본래 이미지를 왜곡시킨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현수막이 걸려있다고 상상해 보자. 명화 한가운데 리본을 두른 격일 게다.
특히 제대 주위에는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제대 양편의 긴 현수막을 걸어 놓으니, 제대가 상대적으로 작게 보인다. 제대보다 현수막이 눈에 먼저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 현수막이 특정 행사일만이 아니고 몇 달째 내리 걸려있다. 본당 설립 기념행사가 매일 미사의 우선이 되는 듯하다. 제대 주위에도 현수막을 달아야 할 때가 있다. 추석 합동 위령미사처럼, 특별한 행사를 겸한 미사는 행사를 설명하는 현수막이 필요하다. 행사를 마치고 곧바로 떼어내면 된다.
현수막은 쉽고 간단하게 알리는 장점이 있지만, 미관상 좋지 않다. 주변 경관을 해친다. 광고나 캠페인에 이용하거나, 대중을 선동과 조작의 대상으로 삼는 집단에서 자주 쓴다. 정치인은 물론 여러 이익단체에서 과격한 현수막을 내건다. 현수막은 정보전달의 기능보다는 투쟁과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현수막 자체 이미지에도 문제가 있다. 이런 현수막을 거룩한 성당 여기저기 걸어야만 할까. 보여주기식 홍보가 보여주기식 신앙생활을 하게 할지 우려된다.
요란한 홍보물보다는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강한 메시지를 준다. ‘감동사목’을 내건 신부가 있다. 교우들이 감동하도록 교우 입장에서 애쓰는 분이다. 하루는, 신자 몇이 신부를 고깃집에 초대했다. 신자들이 고기를 맛있게 먹는데, 신부 혼자 된장찌개를 시켰다. 다음날 어느 신자가 뒤늦게 깨닫고 말했다. “어제가 금요일, 금육하는 날이었어요.” 그 신부는 분위기를 깨지 않고, 교우 스스로 깨치기를 기다렸다.
복음을 전하려면 눈길을 끌기보다는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신자들의 가슴에 색칠하거나 수를 놓는 게 아니다. 마음에 울림을 전해야 한다. 마음이 따뜻해지도록 감싸야 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8)
글 _ 김승월 프란치스코(인하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