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복자바위, 순교자 광장으로 옮겨

입력일 2020-09-24 16:49:59 수정일 2025-06-10 15:17:37 발행일 1973-04-29 제 86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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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가신지 1세기만에 아산서 

압송 복자 쉬어갔던 유서깊은 바위 
다섯복자의 순교사연 되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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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아산서 절두산순교자기념광장으로 옮겨 전시된 복자바위

【서울】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가 발톱을 세우던 1866년 3월 충청도 내포(內浦)에서 잡힌 세 프랑스인 신부와 한국인 신자 2명이 서울 압송과 형장으로 가는 길에 잠시 걸터 앉아쉬며 「진리의 웅변」을 토했던 「복자바위」가 11일 오후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에서 절두산 순교복자 기념광장으로 옮겨져 1백7년 전 순교복자들의 모습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동천리 삼거리 주막 앞에 놓여진채 「복음바위」또는 「반석바위」로 불려온 두께1m 지름4m 둘레11m 무게15톤의 평평한 이 화강암바위는 형장으로 끌려가던 다섯 복자의 인간적 고뇌와 영생을 향한 환희의 순교사연을 담은채 버려져 오다가 최근 절두산 순교복자 기념광장 박희봉 신부와 교회사 연구가 오기선 신부가 답사, 이번 현지주민들의 양해 아래 서울로 옮긴 것이다.

1845년 입국한 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ㆍ안 주교(한국명 안돈이)가 21년 전교끝에 위앵ㆍ민 오매뜨르ㆍ오 두 신부와 함께 내포에서 관헌에 붙잡힌 때는 1866년 3월11일.

이때 함께 잡힌 장주기(요셉) 회장과 함께 이들은 15일 공주 감영을 떠나 서울 압송길에 올랐다.

머리에 누런 고깔을 쓰고 붉은 포승을 걸친채 포졸들에게 끌려가던 길에 동천리주막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주막 앞에 있는 6~7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이 바위를 발견한 포졸들은 압송자들을 동정한 나머지 포승을 풀고 바위위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했던 것.

때가 봉제시기인지라 포졸들이 사주는 고기는 사양하고 대신 떡과 술로 요기를 한 안 주교는 이 바위 위에서 모여든 구경꾼들을 향해 마지막 강론을 시작했다.

『우리는 죄 있어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죄없는 죄인이 되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잡혀갑니다』

서울에 도착, 24일 사형언도를 받은 이들은 새남터에서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마침 고종(高宗)의 건강이 좋지않고 혼례를 1개월 앞두고 있어 궁중안 「무꾸리」들이 서울안에서 피를 흘림은 좋지 않다는 진언에 따라 형장이 중남 대천앞바다 「갈매못」으로 변경되어 다시 2백50리길을 걸어 내려가게 되었다.

이때 이들보다 먼저 잡혀있던 장석두(루까)가 동행케돼 일행은 다섯이 되었다.

27일 형벌에 상한 다리를 유지와 베로 감고 포승에 묶인채 「갈매못」으로 행하던 일행은 다시 이 바위를 지나게 되었다.

포졸들은 일행을 바위위에 쉬게 하고 『사자밥인셈 치고 먹으라』고 밥과 술을 나누어 주었다.

형장까지는 다시 2백여리 얼마 후 맞게될 영생의 순간을 묵상하던 순교자들의 입에서 나직한 성가가 흘러나왔다.

『무궁무진세에 천주께 영광이여 주의 용사들이 승전하여 계시니 실로 오늘날이 기쁜날이로다 …』

환희에 찬 성가의 여운을 남기며 순교의 길을 떠나 30일 오전 충남 대천군 보령읍 수영 앞바다에 도착, 「갈매못」 모래사장 위에 안 주교, 오매뜨르 신부, 유앵 신부 황석두, 장주기 순으로 순교의 피를 뿌렸으니 이때 안 주교 나이 48세, 오매뜨로 신부는 한국에 나온지 2년만인 29세였고 유앵 신부는 불과 8개월만인 30세였다.

세 신부의 유해는 1882년 일본 「나가사끼」에 옮겨졌다가 1894년 용산신학교를 거쳐 1900년 명동성당에 안 주교의 유해는 절두산에 안치됐다.

「복자바위」의 사연은 충남 합덕본당 주임으로 있던 「빼랭」(백 필립보) 신부가 동천리 신자들로부터 입수, 그 후 현 천안본당 주임 박노열 신부와 온양본당 주임 한도준 두 신부가 정리, 70년 12월12일 박희봉 오기선 두 신부와 함께 현지를 답사 확인했다.

이 바위는 그간 수송이 어려워 운반치 못하다 이번 미83병기 대대 「토마스ㆍ리틀죤」 중령(신자) 이대형 「트레일러」와 「크레인」 등 장비를 지원해 주어 옮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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