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 TV의 드라마를 볼 기회가 있었다. 중간부터 우연히 보게 됐으므로 드라마의 전·후 내용을 제대로 이해 할 수도 없거니와 코믹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 듯해서 다른 일을 하면서 건성으로 시청 아닌 경청을 하고 있던 나는 등장인물들(아마도 부부로 여겨짐)의 대화에 접하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만일 당신이 그 일을 고집 한다면 앞으로 돌이킬 수 없이 불행한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어요』
부부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돌이킬 수 없이 불행한 사태」란 과연 무엇일까.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한 사람만이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니 그 보다 안방극장이라 불리 우면서 특히 여성들(주로 주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TV의 드라마 중에서,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부부의 발언에서, 이 처럼 험악한 내용이 튀어나와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쳐 지나가듯 들려온 그 한마디는 오늘 우리사회에 대해 한순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렇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말의 극단화」현상이 곳곳에서 넘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폭탄선언」들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최후의 심판대위에 서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말의 극단화」현상은 현재「개헌」이라는 최대의 정치이슈를 안고 신음하는 정치의 현장에서부터 이미 오래전에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사태, 문제들이 발생할 때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들은 거의 모두「최후의 통첩」일색이다. 『만일 그 같은 발언(또는 결정)을 취소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이 중대한(또는 불행한)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 외에『불행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질 각오를 하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서로 윽박지르고 있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책임이 어느 한쪽에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의 발언대로라면 다른 한쪽은 그 불행하고 중대한 사태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해석이 된다. 과연 그럴까. 어느 한편에 더 큰 책임이 있건 불행한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닥친 현실적인 결과가 된다. 그들이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 내 팽개치고 혼자만 살겠다고 국외로 도망친다면 혹시 몰라도…
국가의「대사(大事)」를 놓고 중대한 논의와 결정을 해야 하는 정치인들에게 있어 이 정도의 극단적인 표현은 아무것도 아닌 엄포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국민들 특히 소시민들의 경우는 다르다. 달라도 크게 다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정국이 을씨년스럽기만 한데 의견이 대립되거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들이 서슴없이 선택하는「최후의 선언」들은 매번 커다란 충격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다. 한 국가에 있어「돌이킬 수 없이 불행한 사태」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확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문제는 정치현장에서 파생된 언어의 극단화현상이 사회전체를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의 혼돈의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데 있다.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펴들 때마다 방송을 들을 때마다 눈앞을 가로막는 주먹만 한 활자들로 인해 가슴을 쓸어내린 경험이 우리에겐 너무나 많다.
「전국, 파국에 직면」「불행한 사태발생 무시 못해」등등 그래도 감이 약간은 먼 듯 한 충격에서부터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로 당장 이 땅의 거의 모두가 수몰되는 듯 한 공포의 경험, 그리고 거의 모든 학생들의 의식을 의심하게 만든「건국대사태」의 충격에 이르기까지 충격의 연속으로 우리의 가슴은 또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가.
언어의 극단화는 행동의 극단화 현상을 반드시 동반한다. 극단적 행동은 곧 폭력으로 이어 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이미 인식하고 있다.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강남 영등포 일대를 휩쓸었던 조직폭력배의 폭력회오리도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사회를 풍미하는 이 같은 오류들은 그 오류를 파생시킨 근원지에서부터 바로 잡혀져야 할 것이다. 「불행」「파국」「위기」운운의 최후 발언을 함부로 남용 하지 말라는 소박한 소시민들의 경고에 정치현장이 먼저 귀를 기울여야한다.
국가와 국민의 운영이 국민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좌우 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들의 손에 가볍게 달린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한다.
참된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를 이겨낼 수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은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다.
누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무조건 나쁜 길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다. 한 문제를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갈래로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반드시 자기 식으로만 선택하고 봐야한다면 그건 독선이며 아집이다.
독선과 아집은 이쪽저쪽, 내편 네편식의 분명한 금을 긋게 한다. 일단 금을 긋고 나면 우린 모두가 서로 적이 될 뿐이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린 너무나 오랫동안 깊고 굵은 금을 땅위에 가슴속에 긋고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