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백민관 신부가 엮는 신약성서 해설] 101. 세례자 요한의 순교 2.

백민관 신부 · 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19-07-01 16:26:40 수정일 2019-07-01 16:26:40 발행일 1990-08-19 제 171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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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6, 14~16: 6, 21~29: 마태14, 1~2: 6~12: 루가9, 7~9)
헤로데, 아내 술수에 말려 살인 저질러
요한의 부활ㆍ기적 소문에 당황하기도
세례자 요한이 언제 감옥에 갇혔는지 그 연대는 복음서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얼마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만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성서의 부록이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헤로데 안티파스가 자기의 이복 형수 헤로디아와 결혼한 연대를 기원 27년으로 잡고 이 해에 세례자 요한의 설교활동이 정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에 예수께서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마르꼬는「요한이 잡힌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1, 14)고 전한다.

기원 28년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하여 몇몇 측근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상경하였다(대목32 참조) 그후 근 일년동안 예수의 갈릴래아 전교활동이 전개된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은 기원 29년초이고 헤로디아의 농간에 농락되어 그의 목을 자른 것은 얼마를 기다린 같은 해의 일이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빵의 기적으로 수 천명을 먹인 일이 있기 바로 전이다. 요한이 어디에 감금되었었는지는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해의 동쪽 요새인 마케투스감옥이었다고 한다. 이 요새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중요 요새로서 안티파스의 부왕 헤로데 대왕의 주거주지였고 안티파스가 물려받은 곳이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하여 전처 나바테아의 왕의 딸을 가둔 곳이기도 한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파스가 요한을 투옥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왕은 자기 배행을 들추어 떠들어 대는 요한 때문에 일종의 민중봉기 같은 일이 있지 않을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고 그 일이 있는 날에는 로마황제에게 대하여 자기의 정치생명은 끝장이 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정치욕의 노예였던 아내 헤로디아가 더 강하게 품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살의를 가슴깊이 품고 있던 헤로디아에게 결국 좋은 기회가 왔다. 남편 헤로데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은 것이다. 헤로디아는 치밀한 계획으로 이 잔치를 준비하였다. 해로데의 고관들, 특히 갈릴래아의 내노라하는 요인들을 모두 초청하였다.

상식적으로는 분봉영토의 수도인 티베리아데스궁에 이 잔치를 배설했음직하지만 즉석에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 달라고 한 무희 살로메의 요청을 금방 들어 준 것으로 보아 연석은 요한이 갇혀있는 마케루스 요새궁전에서 베풀어 졌다고 보는 것이 그렇듯 할 것이다.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가 두번째 결혼을 하기 바로 전에 전 남편에게서 난 딸로서 연석에 참석했을 때는 스무살이었고 아직은 미혼이었으나 나중에 이복 삼촌 필립과 결혼한 여자였다. 잔치석상에서 춤을 추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창녀들의 일이었다. 왕녀의 위치에 있으면서 창녀처럼 행동한 것은 악랄한 어머니 헤로디아가 원한풀이를 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딸마저도 창녀노릇을 하게 한 것도 있고 살로메 자신으로는 모양새가 전혀 없는 헤로데왕조 집안의 부패한 환경에서 막 자란 여자임을 알수 있다.

군주가 자기 휘하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약성서 에스텔서에 따르면 아하쑤에 루스왕이 이와 비슷한 잔치를 베풀고 자기 권세를 휘하 고관들에게 과시하였다(1,3). 헤로데 안티파스는 명사들 앞에서 자기의 허세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조카이며 아내인 헤로디아의 오빠, 헤로데 아그리빠 1세가 로마로부터 정식 왕칭호를 받은데 비하여 자기는 로마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분봉왕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고 허세에 취했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디아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있었다. 춤을 춘 살로메에게 자기 왕국의 절반이라도 달라면 주겠다고 맹세까지 하며 허세를 부렸다. 이런 약속은 구약성서 에스텔서에도 허세의 약속으로 민중에게 전해져있다. (5, 3: 7, 2). 실상은 자기 땅덩어리의 한뼘도 줄 권리가 없었다.

헤로디아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준다한들 온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판에 그 약속은 실속이 없었다. 당장에 요한의 목을 요구토록 부추겼다. 왕은 이예기치 않았던 요구에 당황한다. 의인의 목을 자르는 일은 어쩐지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앞에서 맹세한 일이라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귀찮은 방해꾼을 처치하기는 하였지만 민중속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느니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반폭군적인 복수심리의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문은 사실은 예수의 기적활동을 보고 유대아인들이 품었던 메시아 내림의 민족적 기대의 발로였다. 이 소문을 듣고 헤로데는 찔끔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죽인 요한이 틀림없다고 실토하였다.

말없이 죽어간 의인 요한과 예수를 그리스도교 공동체밖의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연결시킨 것은 요한의 죽음이 예수의 의로운 희생죽음을 준비시키는 복음사가의 의도이다. 요한을 죽인 자나 예수를 죽인 자들에게 대하여 천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복음사가들이 한번도 한일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천벌을 받았다.

헤로데는 나바테아 왕녀를 소박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바테아왕의 공격을 받았고 이 전쟁에 패하였다. 그리고 로마황제의 노여움을 사 리옹이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헤로디아도 같이 따라갔다.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 묻은 것은 의인의 죽음에 대한 성서적 존경의 표시이다.

백민관 신부 · 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