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94년(나해) 복음의 동반자 마르코복음

입력일 2018-05-17 14:35:02 수정일 2018-05-17 14:35:02 발행일 1994-03-06 제 189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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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와 신비의 극적인 역사

절제된 언어로 복음 내용 집약
「하느님 아들」예수 선포에 중점
사도 베드로로부터 세례 받은 자로 추정
전례력으로 나해인 1994년의 복음은 대부분 마르코 복음서에서 발췌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마르코 복음은 언어 표현 양식의 절제와 세련미에도 불구하고 그 진가가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으나 현대 성서학의 발전으로 그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마르코 복음서의 저술 배경과 특징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물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금년도 교회력에서는 주일 복음을 대부분 마르코 복음에서 발췌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 첫 주일에도 우리는 마르코 복음을 들었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마르코 13,33).

◆하느님의 복음 축소

마르코는 예수의 공적 활동을 다음의 말로써 시작하고 있는데 마치 집광렌즈를 통해 모아놓은 것처럼 예수의 활동을 요약하고 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이것은 “하느님의 복음”(마르코 1,14)을 아주 축소한 것이다. 예수의 등장은 때가 다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 역사의 출발점은 세례자 요한의 등장이며, 그의 회개의 외침과 요르단강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느님이 예수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마르코 1, 11)이라 증언함에 있다.

◆오랫동안 평가절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공개된 후에는 예수가 받은 유혹에 관한 보고가 따른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그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코 1, 12~13).

마르코 복음의 이 두 구절 속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들짐승들에 관한 언급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사야는 메시아의 왕국에서는 암소와 사자가 함께 풀을 뜯어먹고 어린 아이가 독사가 숨어있는 구멍 앞에서 놀고 있다고 예언하고 있다. 이 구절들이 마르코 사가의 상징인 「늠름한 사자」를 위한 대부가 된 것이다.

마르코 복음은 오랫동안 과소평가 되어왔었다. 사람들은 마르코는 마태오 복음을 짧게 요약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을 마태오 복음 다음에 두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 파피아스는 마르코는 사건들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즉 질서 없이 그냥 서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르코는 마태오의 몸종에 불과하므로 마태오 복음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1세기 때 신학자들은 아무도 마르코 복음 주해서를 쓰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물론 절제되고 말을 아끼는 마르코의 언어 때문이다(루카는 거의 두 배로 광범위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부들의 비유적 성서 해설을 위해 마르코 복음은 아무런 도움이 못됐다.

마르코 복음을 나중에 새롭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 것은 특히 현대의 성서학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언어와 문장의 비교에서 볼 때 많은 경우에 마르코 복음이 마태오나 루가보다 훨씬 오래된 원본이었다. 바로 두 번째 복음의 짧고 명료한 표현 방법을 통해서 예수의 복음에, 그분의 말씀과 행적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

마르코 복음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복음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복음은 로마의 군대가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생겨난 것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말의 재앙으로 생각되었는데 이 복음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암시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자신은 자기의 복음서 안에서 한 번도 저자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복음서에 「마르코에 의한」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매우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파피아스는 2세기에 마르코를 「베드로를 해석한 사람」으로 불렀고, 이 복음서가 신약성경 안에 보존되게 된 것도 바로 사도들의 머리인 베드로와의 관계 덕분이라 볼 수 있다.

요한도 마르코라고 불렸는데(사도행전 12, 12) 그럼 이 마르코는 과연 누구였는가는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다. 베드로 전서의 말미에 있는 인사말에서 마르코를 「베드로의 아들」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마르코는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임을 말해준다. 바오로도 자기가 직접 세례를 준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마르코는 얼마동안 바오로를 따라 다닌 적도 있었다.

마르코는 아주 어려운 과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한 신자 공동체를 이제 온전한 신앙 체험으로 이끌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외교에서 온 신자들을 위한 일종의 교리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청중들은 유대교의 관습들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 해설자

구체적인 예를 들면 헌금하는 과부가 렙톤 두 개, 곧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을 넣었다(마르코 12, 42)고 했는데 마르코는 청중을 위해서 돈의 가치를 계산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가 어디 있었는지 갈릴레아 시리아 또는 로마인지 확실치 않다.

마르코는 이미 예수님 말씀들을 구전이나 서면으로 모아놓은 것들, 특히 수난과 부활에 관한 것들에 의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말들을 새로 편성했지만 많이 변경하지는 않았다. 한 구절과 다른 구절을 서로 연결시키는 「그리고」란 연결어가 성서 서술 형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르코는 단순한 수집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문학 형태이다. 즉 복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결코 어떤 스타의 전기나 소설이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명확한 구조를 갖고 있다. 복음사가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자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종합했다. 그래서 마치 엄격한 조형 원칙들을 가지고 있는 이콘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연결어 「그리고」 독특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의 시작”(마르코 1, 1). 이 구절과 함께 예수가 죽는 순간 외교인 백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코 15, 39)하고 고백하기까지의 큰 테두리가 드러나게 된다. 가장 중심적 동기(그리고 동시에 전환점은 베드로가 한 메시아 고백이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코 8, 29). 복음서의 첫 부분은 예수가 갈릴레아에서 활동하신 것이며 다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즉 수난으로 향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결정적으로 계시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 마르코 복음서는 동시에 우리가 예수의 길을 함께 가도록 불려진 것을 지적하고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관한 계시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예수의 길을 함께 가는 데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는 우리를 신앙과 추종의 길로 이끈다.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적에 대한 증인이 됨으로써 곧 신앙에로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로 인도

사람들은 마르코 복음서를 「계시와 신비의 극적인 역사」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밖으로 소문 내지 말도록 여러 번 당부했다(병자를 치유한 후, 악령을 쫓아낸 후 그리고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이후에). 이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고자 하는 복음의 뜻이기도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예수의 활동 안에 스며있는 엄청난 능력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비밀스런 신비는 바로 대제관 앞에서의 예수의 재판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소식은 숨겨져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