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 생활 50년의 회고] 16. 십자가 그늘 밑에서

입력일 2011-05-17 15:48:28 수정일 2011-05-17 15:48:28 발행일 1983-04-03 제 1349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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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인도로 무사히 마친 학창시절
위장병으로 늘 고생…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그날그날 넘기면 이불속에서“후유”한숨과 눈물
지난 72년 11월 2일「빠리」중심지에 있는 몽빠르나스 묘지에 기도 하러간 일이 있다. 여기저기 다 돌아봐도 으리으리한 대리석 십자가나 갖가지 생화ㆍ촛불 등이 놓여진 무덤들뿐이었다.

정승으로 간 백만장자ㆍ영웅호걸 고관 대작ㆍ정치가ㆍ예술가들이 모두「한줌 흙으로 돌아간 그 터전」이 물든 마로니에 나뭇잎 사이로 슬프기만 했다.

우측으로 담 옆에「빠리」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묘소가 서 있었다.

그런데 묘비를 읽으려면 밑에서부터 읽어 올라가야 돌아가신 날짜를 찾을 수 있었다. 땅이 하도 비싸서 한 무덤에 묘소를 쓴 까닭이다.

한 무덤에 작고한 순서대로 맨 아래서부터 차례로 장사를 지내 맨 위에 묻힌 분이 가장 최근에 돌아가신 분으로 표시됐다.

우리나라에도 어느 날인가는 이러한 아파트식 묘지가 개발돼야 할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자 그냥 흙으로 납작하게 봉분을 만든 초라한 무덤이 보인다.

「내 유일한 희망, 십자가여」라는 표말이 꽂혀 있었다.

그렇지. 생전에 영웅호걸이든 촌부 야인이든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저 화려한 묘지가 다 무슨 소용인가.

푯말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내 십자가의 그늘 속으로. 「복되다 십자 나무여. 구세주 달려 계시네. 저울과 같은 십자가 인류의 구속 값이라.」

내가 용산 신학교 부속 중학교에 다닐 때 십자가가 나를 인도했다.

1923년 입학해 1932년 12월 17일 대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9년 동안 위장병으로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예부터 신학교에서 성공하려면 S자 셋을 잘 갖춰야 했다. 첫 S자는 덕행(Sanetity) 둘째 S자는 지식(Scince),셋째 S자는 건강(Sanity)이었다.

이 세 S자중에 하나라도 결함이 생기면 보따리를 싸야 만했다.

그런데 나는 다른 두 S에 뚜렷하게 뛰어난 것도 별로 없는데다가 셋째 S인 건강이 늘 문젯거리였다.

그러한 나의 벗 나의 영원한 인생의 반려자는 십자가였다.

죽도 소화가 잘 안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깡그리 굶어야 되는 내 신세. 그때마다 어머니를 찾았다.

신학교 입학할 제『난 이제 네 엄마가 아니다. 정말 네 엄마는 성모 어머님이여. 아플 때면 언제나 네 어머님 성모님을 찾아라. 네 모든 고통 속에 고마우신 성모님의 손길이 널 사제품까지 손잡고 인도하실 게다』라고 부탁하신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나 성당 옆 투르드미사비엘에 모신 성모마리아께 묵주기도를 바치러 찾아갔다.

『어머니. 이 불쌍한 아들이 셋째 S자에 아무래도 걸릴 것 같습니다. 이 불쌍한 아들을 어여삐 여겨 주십시오.』기도하기 몇만 번이었던가 그날그날 하루를 넘기면 이불속에서 한숨을 후유하고 쉬었다. 그리고 두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찬 이불속을 적시곤 했다.「이렇게 마음이 약하고 사내자식이 꺼떡하면 눈물이 뭐냐」하고 자책도 많이 했으나 십자가가 앞에 보일 때는 눈물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내가 눈물의 사나이였지?」하고 혼자 말을 하지만 성당에서 큰 십자가를 보면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한번은 엎친 데 덮치느라고 십이지장충병에 걸려 서울대학병원의 이동 내과에 박 요셉(병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증세가 심하다고 토끼 눈 알 같은 십이지장 구충 제거제 약을 준다. 하루 한 번씩 공복에 먹으라는 것을 얼른 나을 욕심에 이틀 분을 한꺼번에 다 먹어 버렸다.

웬걸. 주일 아침 열시쯤 되니 땅이 돌고 하늘이 빙빙 돈다. 사람들이 공중에 떴다 가라앉았다 했고, 책장의 글씨는 온통 먹으로 칠한 것 같았다.

종지기를 3ㆍ4년 할 때였는데 그날 오후2시 만과경 신공을 공동으로 성당에서 했다.

마지막 종을 치고 나서 마루 바닥에 종 줄을 쥔 채 나자빠졌다.

신공이 다 끝나고 교장 신부님이 이층 종 밑에 쓰러진 나를 보시곤 그 육중한 몸집으로 뛰어 올라오셔서 번쩍 안고 병실로 데려가셨다. 호랑이 같은 교장 신부님도 그날은 양같이 다정하고 인자하셨다. 내가 죽은 줄 알고 눈물까지 흘리셨단다.

얼마 후 깨어나 보니 병실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는데 천주님이 내 호출장을 보시더니『내가 바빠 거기에 도장을 안 찍었어. 도로 돌아 가거라.』하시겠지요… 그래서 다시 이승으로 왔지 뭡니까.

아프면서도 공부에 뒤지지 않으려고 애써 남이 3ㆍ4품을 받을 때 겨우 한 축을 끼어 주신 교장 신부님 은덕에 힘입어 이제 사제 생활이 50년이 지났다. 교장 신부님을 생각하면 이 못난 제자의 가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늘 밑에 자라나는 한 떨기 오랑캐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