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말이 주는 어감(語感)은 ‘어머니’와는 사뭇 다르다. 사회적 인식과 여건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두 단어가 주는 어감은 무언가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아버지’의 이미지는 ‘엄한 분’이었다. 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다. 엄격하다, 딱딱하고 가차없다는 뜻에서부터 가혹하다는 뜻도 있다.
‘아버지’란 말이 갖는 뉘앙스는 그러나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엄하다는 뜻은 무섭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랬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자주 “아버지께 이른다”고 엄포를 놓곤 했다. 무서운 만큼 아버지는 왠지 ‘가까이 하기엔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신체적 정서적 밀착도가 어머니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일반적인 이야기다.
아버지라는 말에는 진득하다, 뭉근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속 깊고 진하다는 말이다. 군에 가는 막내 아들 배웅하러 역 개찰구까지 따라 나선 아버지의 눈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난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가부장적 전통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참 역할과 위치를 상실케 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면이 많다. 아버지는 소위 ‘바깥 일’만 하는 사람,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만족했다. 당연 어머니는 아이들 치다꺼리 하고 살림 꾸리는 ‘안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분(二分)됐다.
그러니 아이들 문제는 늘 엄마의 몫이다. 성적이 떨어져도, 예의범절이 없어도 엄마들은 늘 제 가슴만 쳤다.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맞벌이 가정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가정의 모습에도 변화가 왔다. 과거처럼 바깥 일과 안 일의 구분이 모호해진 세태에 ‘안 일’에 내몰라라 하는 아버지는 더 이상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상황에 내몰려 억지로 일어난 변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변화 자체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들이 피곤한 세상이 온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만큼 할 일이 더 많아진 것이 아니라 애시당초 할 몫을 찾은 것이다.
가정문제 전문가나 상담심리학자들도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어울리며 부대끼는 시간에 비례해서 아이들의 지적 정서적 발달정도도 그만큼 달라진다. 어릴적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때면 늘 한 귀퉁이에 태양을 그려 아버지 역할에 대한 아쉬움을 자아내곤 했던 필자도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버지의 제 역할 찾기에는 최근 교회에서도 붐처럼 일고 있는 ‘아버지학교’의 영향도 크다. 국내 아버지학교는 1995년 10월 개신교 단체인 두란노서원이 개설한 ‘두란노 아버지학교’서 비롯됐다. “아버지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건 아버지학교는 아버지의 정체성과 신원을 되찾고 건강한 가정문화를 꽃피우자는 영성운동이다.
이 아버지학교가 올 6월로 세미나 2000회를 맞았다. 우리 교회의 아버지학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도 바로 선다”.
아버지학교에선 종종 가슴 뭉클한 장면들이 연출되곤 한다. 졸업식날 아버지와 자녀들이 부둥켜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쓴 편지를 읽고, 남편이 아내의 발을 씻겨주며 울음바다가 되기도 한다.
지금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편지를 쓴다면...나는 무엇으로 채울까. 매월 첫 토요일은 온 가족이 서로에게 편지 쓰는 날로 삼으면 어떨까. 그래서 5월만이 아니라 일년 열두달이 가정의 달이었으면 좋겠다. ‘인맥관리 18계명’이란 문구에 이런 말이 있다.
“아내(남편)를 사랑해라. 너를 참고 견디니 얼마나 좋은 사람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