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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경험과 배움 - 십일조

전대섭 편집국장
입력일 2008-02-17 09:19:00 수정일 2008-02-17 0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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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배움’이란 단어는 언제 들어도 매력적이다. 경험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대부분 그렇다. 호기심이 발동하고, 그기에 의지가 실릴 때 경험은 이루어진다. 경험에서 얻는 최대의 소득은 배움이 아닐까. 그래서 경험은 값지다고들 말한다. 물론 무엇을 경험하는지, 그 내용에 따라 경험의 가치는 천양지차이긴 하다.

필자에겐 ‘십일조’에 얽힌 소중한 경험이 있다. 제 자랑인양 들릴 것 같아 조금은 쑥스럽다. 하지만 나의 경험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또 경험에서 배운 것이 값지고 귀하다고 여기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경험을 나누려 한다.

십일조 경험이 내게 특별히 값진 배경부터 설명해야겠다.

필자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유독 금전적인 ‘사고’(?)를 여러 번 겪었다. 그 사고란 것이 부끄럽지만 ‘돈 떼였다’는 말이다. 지나고 보면 누구 탓할게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내가 부주의하고 생각이 짧았던 탓이다.

문제는 그 여파가 심상치 않았다는데 있다. 월급쟁이로선 어마 어마한 돈을 날린데다, 하필 그 무렵 살던 전셋집마저 경매에 넘어가는 불상사가 겹치기도 했다. 그땐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길거리에 나 앉는 심정이란게 이런건가 싶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우여곡절 끝에 경매 처분될 집을 낙찰받아 한숨을 돌리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10년 전 일이다.

마뜩찮았지만, 이런 일들을 통해 ‘내 수중에 있다고 해서 모두 내 돈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구나’라는 배움을 얻었다. 그런다고 현실적인 고민이 해결되진 않았다. 한 동안 사소한 일로도 예민한 언쟁이 이어졌고, 돈 때문에 다툼도 잦았다. 신앙생활도 미지근하게 그저 그랬다.

수년전 서울 살 때 일이다. 우리 가족의 삶에 대 반전이 찾아왔다. 한 아파트에 살았던, 둘째와 같은 반 아이의 부모를 만난 것이 인연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그들의 모습은 ‘신앙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와 아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철저한 ‘십일조’ 정신과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부러울 정도였다. 솔직히 이들을 만나면서 ‘개신교 신자’에 대한 나의 선입견도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

그 무렵 언젠가 아내가 제안했다.

“우리 십일조합시다.”

“우리 형편에 어떻게?” 내심 반가우면서도 자신은 없었다.

“해본 사람들이 말합디다. 하느님은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더이상 거부할 명분도 용기도 없었다. 우리 가정의 십일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날 이후 몇가지 배운게 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난게 아니다”는 단순한 진리다. 또 “꼭 열심해야 십일조를 하는게 아니라, 십일조를 제대로 함으로써 열심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교무금 책정 때 혹은 주일 헌금 때, 초라한 액수에 주변 눈치 보기 급급했던 것이 이젠 낼 만한 사람들이 너무 인색한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여유도 생겼다. 무엇보다 가장 큰 배움과 소득은 “십일조 하나라도 성경말씀과 교회 가르침대로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성경에도 가난한 과부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이 부자의 풍족한 헌금보다 더 값지다고 했다(마르 12, 41~44). 그동안 내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별거 아닌 일로 너스레를 떤거 같다.

전대섭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