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서울 토박이다. 강남의 교통 요지, 노량진(鷺梁津)이 필자의 고향이다. 하기야 한강을 두고 남쪽에 접해 있는 ‘진’(津)이 바로 노량진이니, 강남은 강남이고 실제로 도로와 교각이 사통팔달(四通八達), 동서남북으로 아니 걸쳐진 길이 없으니 교통의 요지인 것도 분명하다.
노량진은 예로부터 한강의 도진취락(渡津聚落), 곧 하천이 교통량이 많은 도로와 접함으로써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과 물량을 수용하는 시설과 기능이 집중돼 큰 취락으로 발달한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언급했듯이 교통이 좋아, 실제로 필자가 이리저리 취재활동을 다닐 때면 자동차로든, 지하철로든 그 앞을 지나는 일이 많다. 다소 쑥스럽지만, 이곳에는 무려 40여 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자의 ‘생가’(生家)가 건재하다.
45도 각도로 가파른 언덕 옆구리에 붙은, 야트막한 1층 한옥집이라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 그곳 방 한 켠에서 나고, 그 골목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필자에게는 KTX를 타고 지날 때도 처마밑 서까래 하나까지 눈에 들어온다.
한 번은 차를 몰고 지나다 고장이 나서 바로 앞의 카센터를 들른 적이 있다. 수리에 1시간 남짓 걸린다기에 차를 두고 시장통을 지나 그 ‘생가’ 앞 골목까지 걸어보았다. 대로에서 50m 남짓 들어선 후, 집으로 통하는 골목으로 접어들 무렵 아무런 이유 없이 가슴이 벅차고, 눈시울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리 슬픈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밤늦도록 딱지며, 팽이를 들고 골목길을 헤매던 흥겨운 추억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그곳에서의 유년이었다. 생각건대,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이유는 아마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그 장소와 시간들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금 체험하게 된 때문인 듯하다.
당연히 지금이야 길도 옛길이 아니고, 집도 옛집이 아니며, 사람들은 더욱 옛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오랜 현장을 만남으로써 그 옛날의 시공간이 다시금 필자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재현됨을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다시 카센터로 돌아와 수리가 다 된 차에 올라 시동을 걸 때까지 그 감흥은 나를 사로잡고 있었으며, 이후 며칠 동안 필자는 다소간 들뜬 감정 상태 속에서, 아스라하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추억들을 다잡느라 애를 먹었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
순교자 성월을 맞으면서 필자는 성지순례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잘 것 없는 내 삶의 추억의 장소를 만난 일이 이렇게도 많은 감흥을 주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취가 어려 있는 성지, 피를 흩뿌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선조들의 향기가 어려 있는 순교지와 사적지들은 얼마나 많은 격동을 줄 것인가 짐작키 어렵다.
그 동안 겪었던 몇 번의 성지순례는 그저 주어진 일정에 맞춰 유람하듯, 관광하듯 그렇게 스쳐 지나갔던 것임에 틀림없다.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머리와 가슴을 열어젖혀 순례를 떠났다면 그렇게 무덤덤하게 지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여행의 고수들은 낮선 곳을 가는 여행을 두고 “아는 만큼 본다”고 말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순례의 여정도 마찬가지이리라. 순례의 길에서 우리는 미리 준비하고 기도하는 꼭 그 만큼 은총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관광이 아니기를, 순례이기를 작심하고 떠나 보리라.
박영호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