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이란?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7-01-14 16:47:00 수정일 2007-01-14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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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활발히 추진

의화교리 공동선언 등 일치 노력 전개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무엇보다도 교회 일치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일반알현(2005. 1. 25.)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은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다음 날인 2005년 4월 20일 성 시스티나 경당에서 봉헌한 첫 공식미사 후 연설을 통해 교회 일치에 관한 교황의 직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교황은 이 연설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가시적이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저의 첫째가는 임무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교황직 최우선 과제

교황은 이어 그해 6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대표단과의 만남에서도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이 교황직 수행의 최우선적인 과제임을 재차 강조했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 보편교회를 이끌고 있는 교황들이 자신의 중요한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있는 ‘교회 일치’는 제삼천년기를 헤쳐나가는 교회에 ‘나침반’과도 같은 의의를 지닌다.

교회 일치를 뜻하는 말로 알려진 에큐메니컬(ecumenical)은 ‘사람들이 사는 온 누리·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οικουμενη·oikoumene)’에서 파생된 말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낳은 위대한 신비가인 교부 오리게네스는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오이쿠메네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류로서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 정신에 따라 교회는 민족적, 국가적 구별을 초월한 인류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며, 세상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십자가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형제적 관계 회복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일치운동의 핵심적 요소는 복음적 의미의 형제적 관계 회복으로 대변된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일치운동은 교회의 여러 가지 필요와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진하도록 일으키고 조직하는 활동과 사업”(일치교령 4항)으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갈라진 형제들의 상황을 공정하고 진실하게 반영하지 못해 그들과 상호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삼가는 모든 노력과 각각 자기 교파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성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보편교회의 일치운동을 이끌고 있는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세계화 시대에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은 시대적 징표”라고 역설한다.

교회 일치운동의 역사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본격화

보편교회 안에서 일치운동은 교황 비오 9세가 1869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는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을 통해 교회론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림으로써 일치운동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일치교령은 통교(通交)로써 교회의 개념을 제시, 가톨릭과 개신교가 세례로써 통교를 이루고 있어 일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본격화된 일치를 위한 교회의 노력은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동방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방문함으로써 신기원을 이룩했으며 이듬해 12월에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는 가톨릭-정교회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신학적 대화를 시작했다.

개신교와는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72년부터 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어 72년 말타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희년을 앞둔 1999년 가톨릭과 루터교가 함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지난 450여년간 두 교회 사이에 이어져온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장을 열게 됐다.

◎한국교회 일치운동 발자취

70년대 신구약 공동번역성서 출간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 발족…포럼·친교의 장 마련

우리나라 천주교와 개신교는 창조주의 이름(하느님/하나님)을 비롯해 성경의 명칭, 신학 용어, 심지어 인명과 지명도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회다. 상대 교파의 용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러한 배타성은 그리스도인의 일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왔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교회 일치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다. 한국 교회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1965년 7월 4일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교회 일치운동을 결의하고 ‘전국 그리스도교 재일치위원회’를 설립한다. 이어 1968년 일치기도주간(1월 18~25일)을 맞아 한국 교회 최초로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합동기도회를 열고, 교파 대표자 간담회도 개최했다.

일치운동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서 공동번역사업이었다. 한국교회는 1968년 가톨릭과 개신교 대표로 공동번역위원회를 구성해 1971년에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1977년에 구약 공동번역 성서를 펴냈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민주화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군부 독재 치하에서 사회 정의구현, 민주화 운동 등에 투신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 일치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민주화가 진전된 90년대 들어 교회 일치에 대한 인식과 참여도는 떨어졌고, 각 종단의 성장 위주의 선교정책으로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마저 높아져 일치운동은 뒷걸음치는 모습마저 보였다.

2000년 대희년을 기점으로 교회 일치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교회 차원의 공식적인 대화와 만남의 장이 마련되면서 일치운동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를 발족시키는가 하면 일치기도주간에 에큐메니컬 포럼을 개최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의 축구경기를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신자들의 일상에서는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이 팽배해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어서 일치운동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사진설명

2006년 7월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과 최창무 대주교 등은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린 교회 일치 특별예배에 참석했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