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멈추었을 때

이승훈
입력일 2025-05-14 09:20:50 수정일 2025-05-14 09:20:50 발행일 2025-05-18 제 344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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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예민하고 짜증도 많은 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면 참을성도 부족해서 화가 날 때도 많습니다. 몇 년 전 평창에 있는 성필립보생태마을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운전할 일이 많았습니다. 별생각 없이 운전하다 빨간 불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면 목적지에 늦는 것도 아닌데 짜증이 났었습니다.

이런 제 부족한 마음을 하느님께서 아시고는 제게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방울토마토를 수확할 때였습니다. 간단한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던 중 방울토마토의 색들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파란색,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방울토마토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신호등 같았습니다.

파란 방울토마토는 지나가고, 노란 방울토마토는 고민하고, 빨간 방울토마토는 담아갑니다. 빨간 방울토마토를 담기 위해 멈추었을 때, 저는 빨강 신호등 앞에 멈춰 짜증내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멈춰야만 알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저는 멈춤을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빨간 방울토마토를 심각하게 바라보며 제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지라 여기까지도 간신히 왔는데 멈춰 버리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제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내면에 있던 어리숙한 그 마음을 인지하니 유독 짜증났던 멈춤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돌이켜보니 멈추었다고 큰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저는 여전히 사랑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멈춘 그 시간 안에서 저는 제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멈춰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산뜻해진 마음으로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방울토마토를 소매에 쓱 닦아 먹었더니 정말 맛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든 예기치 못한 상황 때문이든 멈춤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달콤한 열매일 수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순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함께 해주셨고 가장 필요한 것을 제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랑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시간도 사실 멈춤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신념, 나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머무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힘들고 지칠 때, 화나고 짜증날 때, 두렵고 불안할 때, 그곳에서 하느님과 머무른다면 우리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열매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만을 위한 그 소중한 시간을 우리 모두 더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멈춤을 하느님과 함께 할 때면 그 시간은 더 이상 상실이 아닌 풍요로움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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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