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에 있는 성필립보생태마을에 있을 때, 둥그렇고 포근한 모양새가 매력적인 산을 멀리서만 바라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산자락에 발을 내디딘 적이 있었습니다. 험난한 산길에 멀리서 보았을 때의 포근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제 발길은 어느새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제 삶에 또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너무나 따듯하고 매력적이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예비 신학생 기간 6년, 신학생으로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포근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져 꼭 한 번 그 뒤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되새기곤 했습니다. 기어코 그날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포근함에 감추어진 험난한 그 길에 올라설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날에 저는 훈련병처럼 큰 소리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해 버렸습니다. 둥글둥글한 산과는 다르게 여기는 하산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다에 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는 이게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었고, 잠깐의 분심에 미사 경문을 잘못 읽었을 때에는 식은땀이 줄줄 났습니다. 강론은 제 삶과 다르게 너무나 거룩해서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해야 할 기도는 왜 이렇게 많고 귀찮은지 의무감에 꾸역꾸역 바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감동받았다고 저를 치켜세워주시는 신자분들을 만날 때면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적응이 될 무렵 다가오는 인사이동은 저를 항상 미궁에 몰아넣는 것 같았습니다. 말도 느리고 행동도 느린 저로서는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 참 고역이었습니다. 이제야 적응이 된 것 같은데, 새로운 곳에서 내가 복음을 잘 전할 수는 있는지, 새로운 곳에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매번 걱정, 또 걱정했습니다.(신부님마다 다릅니다.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만약 부르심의 길이 등산이었다면, 저는 진작에 하산했을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를 너무나 아껴주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과 제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마음이 진심이면 되지 않을까요?’ 정답을 주려 하지 말고 진심을 주는 것, 이것이 사제에게 필요한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마음을 다하는 것만큼 중요한 자세도 없는데 저는 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한 걸음을 걷더라도 진심을 다해 걷는다면, 주님께는 충분한 봉헌 제물일 것입니다.
느리더라도 진중한 한 걸음, 그 순간이 저에게 가장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 대단한 것을 이루려는 마음보다 진심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는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