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철 늦은 꽃 (50) 분수령 ⑯

安壽吉 作 文學晉 畵
입력일 2023-12-19 14:11:51 수정일 2023-12-27 10:16:09 발행일 1969-12-28 제 69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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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부의 활달하고 깊이 있는 인생통찰의 말이 현주의 까물까물 졸음이 오는 것 같은 의식 세계에 활력을 불어 넣은 셈이었다.

(이것이 죄는 아니라고? 오직 애정의 유무가 문제라고?)

현주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김 신부의 말이 고스란히 귀에 쟁쟁함을 깨달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깊이와 넓음이 잡혀지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너그럽고 깊을 수 있을까?)

현주는 교우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 그것이 퍽으나 보수적이요, 융통성이 없는 것이라는 선입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자신의 종교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랬는데 이번 사건에 대한 김 신부의 말은 결코 보수적인 관점도 아니요, 융통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속적인 입방아를 풍자적으로 나무라는 말까지 했다.

현주는 우선 구원을 받은 듯한 심정으로 김 신부가 말한 핵심인 「애정의 분수령」을 되새기면서 몇일을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고 해부, 분석하는 시간으로 충당했다.

(용신이에게 애정이 있다?)

물론 모성애 비슷한 것 바로 그것이 모성애는 아니나 그런 차원(次元)에 들 수 있는 애정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러나 이성으로서의 용신이에 대한 애정은?

겸허하게 그 해답을 모색했다. 있다는 결론이 잡혀졌다. 오히려 그것은 넘칠 정도로 충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용신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킨대도 뉘우침도 없는 심정, 이것은 이해타산도 의무감(義務感)도 남에게 좋게 보이려는 허영심도 아니다. 그대로 애정, 이성에 대한 애정이다.

『나는 용신이에게 순결한 애정을 지니고 있읍니다.』

김 신부에게도 스스름 없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것을 입증해 주기나 하듯 용신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외국의 차가운 하숙방에서 혼자 고민하고 있을 용신이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주는 심장의 한구석에 구멍이 뚫어지는 것 같이 아파왔다. 눈물이 글썽해진다.

(용신이 용서해줘. 널 너무 괴롭혔어…)

그러나 다음 순간 현주는

(용신이가, 내가 용신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치밀었다.

용신이의 편지는 그렇다는 듯이 종이위에 잉크로 짓이기듯 써 보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젊은 청년의 외국에서의 외로움 때문에 과장된 감정이 아닐까? 현주는 자신이 용신이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버리고 나니 이번에는 용신이의 현주에게 향하는 애정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상의 본질인지 모를 일이다!

어떻든 현주는, 그 후 얼마동안을 용신이의 자신에 대한 애정을 놓고 회의하는 고민을 겪고 있었다.

(지금은, 나를 사랑하고 유일한 여성이라고 생각할지 몰라? 그러나 용신이 음악가로 대성하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릴 때를 생각해 보자. 그때, 나는 눈가에 주름이 잡히게 된다. 용신이에게는 많은 여성의 팬이 생기게 될 거다. 젊은 여성, 꽃같은 여성…)

현주는 이젠 이런 실제적인 문제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능성이 많은, 용신이의 장래의 배신이 현주로 하여금 고뇌의 도가니 속에 처넣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용신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동안 현주는 그나마 위로의 편지도 자주 보내지 못하게 했다. 그게 섭섭하다는 사연과,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귀국해 현주 옆에 있어야 겠다는 내용을 역시 잉크를 종이위에 짓이긴 것 같은 정열로 써 보내왔다.

<…아마 나를 저버린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현주는 거의 않는 사람이 되어, 김 신부를 찾아갔다.

『윤선생 오셨군요.』

항상 인자한 김 신부는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 얼굴을 보니 현주는 눈물이 나도록 마음이 놓여졌다.

그런 마음으로 현주는 숨김없이 그동안 고민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김 신부는 골통대의 담배연기를 뿜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윤 선생의 애정은 확실하다는 말입니까?』

『예』

『박군에 회의를 가진다는 겁니까?』

『예… 그러나 지금 현시점으로는 용신이가 나를…』

『알겠읍니다. 장래에 배신하고 연령에 맞거나 꽃다운 여인에게로 달릴 위험성이 있다는 거지요? 그게 고민이라는 거지요?』

『여자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되는가 봅니다』

김 신부는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머금더니 말했다.

『윤 선생, 사람의 애정이란 더구나 이성에 대한 애정이란 그게 그렇게 변하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까? 물론 개구리 올챙이 때 생각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정이란 그 본연의 자태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더구나 인간으로서의 천분과 소질이 풍부한 사람은 결코 개구리 올챙이 때를 잊는 그런 경박한 재주는 놀지않는 것으로 믿고 있읍니다. 박군을 믿으시오. 만약 윤 선생이 박군에게 애정을 진실로 느낀다면 박군에게 회의를 가지지 마시오…

그것보다도 지금 박군은 위기에 처해 있읍니다. 한사람의 소질과 천분이 풍부한 사람이 허물어지느냐 그 천분을 키워 나가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겁니다.

윤 선생이 그 사람에게 애정이 있다면 늦게 핀 꽃, 철 늦은 꽃이랄까? 이런 표현을 용서해 주시오. 윤 선생의 행복이요, 박군의 앞길이 환히 트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코 남을 불신(不信)해서는 안됩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현주는 용신이에게 편지를 했다.

<…기다리고 있기 바라오. 여권수속을 서두르겠소. 그래 끝나는 대로 용신이 있는데 갈 작정이오…. (끝)

安壽吉 作 文學晉 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