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해설] 김범우 묘소 발굴과 그 증거

김기태 기자
입력일 2020-11-04 16:54:48 수정일 2020-11-04 16:54:48 발행일 1989-10-01 제 167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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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단장(丹場)은 옛귀양지
충청도「단양」은「단장」의 오기
후손들 증언이 결정적 단서
봉분형태. 돌십자가 형상은 신자 확인케 해
이번 김범우 묘소의 발굴은 묘지관리인 박삼위씨의 증언과 김범우의 6대손 김동환씨(75.토마스)등 후손들의 증언、그리고 김범우 가계를 증명하는 경주 김씨 세보와 호구단자、가승、서신 등 구전과 사적인 문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록 중앙이나 지방 관리의 자세한 공식적인 문헌이 아예 없거나 발견되지 않아 대조는 불가능 하지만 이들 사문서와 구전만도 수십 가지에 이르며、서로 다른 종류의 자료들을 상호 보완、대조를 한 결과 상당한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귀양지와 묘소위치、사망연대 등을 분석해본다.

김범우의 귀양지

귀양지에 관한 문헌기록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사학징의」두 군데뿐이다. 이들 문헌에는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되어있다.

순교자현양위원회측은 이를 밀양군 단장(丹場)면의 오기이거나 혼동으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충청도 단양은 옛 부터 휴양지로 유명하며 밀양의 단장은 귀양지였다는 점 ▲밀양의 단장은 지금까지 「단양」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 ▲단장면에는 예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있다는 점 등이다.

밀양의 단장면은 이조초기 귀양지였다는 사실 외에 단장면과 이접한 삼랑진(옛지명〓下東)이 신유박해(1801년)때 천주교신자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벽위편」에 기록되어있다.

물론 벽위편에는 「천주교소굴河東」으로 적혀있으나 경남하동은 유배지가 아닌 점에서 삼랑진 河東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말에 익숙치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선교사는 단장을 단양으로 잘못 전해 듣거나 밀양의 단장을 충청도 단양으로 혼동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정이다

또 실제로 밀양의 단장면은 이곳 주민들의 과거서신 등에서 「단양」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지금도 단양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 이홍직 교수가 저술한 「국어대사전」 (지문각 1971년)에도 밀양표충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단양면(丹陽面) 소재로 표기하고 있다.

묘소확인

설사 순교자 김범우가 밀양에서 순교했다손 치더라도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묘소를 찾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손덕만 신부(부산 청학본당주임)에게서 김범우 묘소가 밀양에 있을 것이라는 제보를 받은 삼랑진본당의 이성기씨(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와 김범우의 후손 김동환씨 등이 묘소의 위치에 관한 수소문을 벌이고 있었고 86년경부터 마백락씨도 호구단자. 족보 등을 찾아 이에 가세했다.

지난 4월 3일(성모영보축일) 이들은 또다시 단장면 법흥리와 법귀리 일대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이번에 발굴한 묘소의 관리인 박삼위씨(밀양군 삼랑진읍 용선동251)를 만나게 된 것이 발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박삼위씨는 3대째 약 80년 간 「다른 집안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씨 집안은 묘소를 관리하는 대가로 밭 2백85평을 하사받았다.

박삼위씨 부인 박재연씨(56)는 1972년 묘소 주인공의 후손인 김외술 노인(김범우의 6대손)이 찾아와서 「산소는 웃대 할아버지의 것이며 서울서 벼슬하다 단장면 법흥리에 내려와 살다 묻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이곳 주민 최종민(81.베드로)노인도 1939년경 묘지후손 김기출씨(김범우 6대손)가 찾아와 「웃대 할아버지(김범우)가 서울서 벼슬하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이곳으로 귀양와서 죽었다」고 말한 것으로 증언했다. 벼슬한「웃대 할아버지」의 묘소는 비로소 박삼위씨 집안이 관리해온 묘소라는 것이다.

김범우의 또 다른 6대손 김동환(일명 만돌.75.토마스)씨는 「김범우 선조 때부터 이곳 (단장면)에서 살았다」고 증언하며 경주김씨 족보 2벌과 가첩 및 호구단자 편지 등의 자료를 내보였다. 이 족보에는 김범우의 가게가 자세히 나와 있다.

사망연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유배지에서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어떤 사람은 상처가 덧나 단양에 도착한지 몇 주 후에 죽었다고 하고、어떤 사람은 2년 후에 죽었다」고 기록하는 등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족보」나 「가첩」에는 1787년 음력 7월 16일 사망했으며 사망 시 37세라는 것까지 밝히고 있다.

봉분형태. 파묘결과

봉분형태는 묘미가 길게 뻗어있는 경상도식이 아니라 꼬리가 없는 경기식이라는 점도 귀양 온 사람과 그 후손들의 묘소인 점이 확인되고 있다.

또 관자리에 놓여있던 「돌십자가」형상도 묘소의 주인공이 천주교신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류흥렬 박사와 변기영 신부는 「십자가와 성물이 없었던 초대교회시대엔 그 대신 돌을 넣어 상징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고증했다.

실제 순교자묘소에서 돌이 나온 경우는 황사영묘소 발굴 때와 안동교구 순교자 묘소 발굴 때、그리고 지난 6월 김해 조씨 형제묘소 발굴시 등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를 비롯한 고려대 조광 교수(사학) 등 일부 교회사가들은 이번 김범우묘소 발굴에 대해 다소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최석우 신부는「어느 정도의 증거를 바탕으로 사목적인 견지에서 공식발표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공식문헌 등을 통한 증거보강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기인 신부는 여태까지 알려진 공식군헌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미비하며、더 이상의 공식문헌도 없는 만큼 수십 건에 달하는 사적인 자료라도 서로 보완이 될 수 있고、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10여명의 후손과 증인들이 있으므로 더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고침

지난 9월24일자 본보1면에 보도된 「김범우 묘소 발굴」관련기사 중 「십자가형상의 4개의 돌」과 관련사진은 인근에서 함께 발굴된 손자 김동엽의 묘소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로 잡습니다. 김범우 묘소에서는 이와 유사한 십자가형상의 「3개의 돌」이 출토됐습니다.

김기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