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이 들자마자 단 하나뿐인 오빠를 병으로 잃었다. 이젠 나 자신이 엄마가 되어 당시의 어머님의 쓰라린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무엇인가 어머님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잃었을까 아니면 숙명이었을까 체념하려고 곧잘 점을 치러 찾아 나서신 것 같다. 언제나 어머니를 따라 다닌 기억이 아련하다.
그 후 나 자신이 어처구니 없는 어버이로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점을 치러 나섰다.
한 번은 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운 겨울 어느날 무당을 데리고 산엘 가 산신제를 지낸다고 굿을 한 적도 있다. 그땐 신념이 없었던 탓인지 젊은 나이로 나 혼자만이 온통 불행을 떠맡고 있는 것 같이 청승맞게 느껴졌다. 왠일인지 내 내부에 종교가 없는 까닭이었는지 회의가 되고 부질없는 것을 뉘우치기도 했다.
그 즈음 친구의 소개로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에 열렬한 외국 여인을 만나 난생 처음 성당이란 곳에 발을 들여 놓았고 물을 찍어(성수) 이마에 바르고 성호를 긋는 것을 가르쳐 줄 때 체면상 따라간 것뿐이었다. 그 후 여러 번 성당에 나갈 것을 권고 받았지만 몸에 배인 것이라고는 걸핏하면 무당 집을 거듭 찾던 나였다.
때로는 구원의 길을 찾지 않고 불행 속에서 체념을 배우면서 살아온 나였다. 그 당시 외유 중이시던 나의 부군께 그 외국 부인이『당신 부인은 샤마니즘에 홀려 정말 전교하기가 어렵다』고 편지를 할 정도로 나는 교회에 가기를 꺼렸지만 우연히 손에 든「무엇하는 사람들인가」하는 책을 읽고 거듭 읽어본 나는 교리를 배우기를 시작했고 지금은 온갖 아픔과 불평 불만도『하느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하는 기구를 드리는 몸이 되었다. 산다는 것 자체를 지겹도록 고통스럽게 느낀 내가 신에 대한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지금 내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의 생활의 이 엄청난 차이, 지금은『하루의 내 생활이 이러이러했습니다. 당신의 뜻에서 벗어난 일들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소서』용서를 비는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 외롭지 않다. 반성을 자주 하는 기회와 새삼스런 사실도 아닌 고뇌에 시달려 절벽에 떨어질 듯한 심정이 될 때도 있다. 어두운 밤 자주 성호를 긋고 마음의 평화를 달라면서 두 손을 모으게 되는 시간, 그리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는 나를 발견하게 되며 처음 성당엘 데려간 그 외국 부인과 나를 찾아주신 신부님과 전교하기 위해 찾아주신 몇몇 분을 항상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