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날 6월 26일 유고 크로아티아ㆍ슬로베니아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자 유고 교회는 두 공화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또 두 공화국의 독립선언은 지난 70년간의 공존생활의 청산을 의미한 것 뿐만 아니라 국가가 나뉘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교회와 남부 슬라비아정부와의 관계가 흥미롭다.
1918년 남부 슬라비아의 생각은 진보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당시 국민이 강제로 병합되도록 압력받았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예컨대 당시 달마티아해변에 대한 이태리의 압력이 거세어졌고 연방공화국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 압력은 벨그라드에서 오고 있다. 지금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이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교구는 교회가 일상의 정치문제에 결코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폭력사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크로아티아의 교회는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 소수민의 권익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갈등으로 점철된 과거
가톨릭교회와 유고슬라비아정부 사이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 되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이후 자그레비의 스테피나흐 대주교와 벨그라드의 정부사이에도 갈등이 생겼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정치적 문제는 아니었으나 당시 교회는 연방정부보다 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지배가 시작되고부터 가톨릭교회는 전형적인 반정부 입자이 됐다. 특히 크로아티아 교회는 당시 국가주의의 요람이었다. 처음 교회는 남부 슬라비아의 통일을 위한 노력에 협조했다. 19세기에 라키 신부와 스트로스마이어 주교는 남부슬라비아 통일을 지지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후 스테피나흐 대주교가 또다시 불을 질렀다. 굳건한 신앙인으로서 스테피나흐 대주교는 훌륭했으나 자그레브의 대주교로서 정치적인 문제에는 오히려 순진하게 대처했다. 스테피나흐 대주교는 1942년 나치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여 맞섰으나 2차대전중 파벨릭정부에 협조하는 신부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1945년 유격대들이 크로아티아의 수도를 탈환했을 때 스테피나흐 대주교는 신자들을 위해서 공산당과 협조해야 할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이상한 「포옹」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티토가 로마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국가적 가톨릭교회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공산당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스테피나흐 대주교가 이를 거부하자 곧 교회박해가 시작되었고 스테피나흐 대주교는 15년동안 징역을 살게되었다. 또한 슬로베니아에서도 많은 신부들과 평신도들이 옥살이를 하게되었다.
따라서 라이바흐와 자그레브교회가 슬로베니아ㆍ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독립을 선언한 직후 일어난 정부군과 슬로베니아인들 사이의 유혈충돌은 물론 좋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이 비극적 배경 앞에서 주요한 도덕적ㆍ애덕적 과업을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유고 가톨릭을 비롯 동방정교회와 정부 지도자간의 평화적인 대화 모임을 주선코자 교황청 특사를 파견키도했다.
자그레브의 프란조 쿠하릭 대주교는 유고의 내전이 하루빨리 끝나도록 기도캠페인을 벌여줄 것을 요청하는 사목서한을 발표하는 한편 예전과 같은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와 참된 회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