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6월 29일 대축일 맞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최석우 신부ㆍ한국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9-05-16 11:27:08 수정일 2019-05-16 11:27:08 발행일 1991-06-30 제 176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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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기반 닦은 사도단의 양대지주

보수ㆍ진보적인 교회모습 보여줘
성 베드로 일치의 상징, 초대교황 사실 확인돼
성 바오로 열성적인 활동으로 여러 교회 세워
해마다 우리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바오로 대축일을 지낸다. 대축일이지만 의무 축일도, 파공 축일도 아니다. 말하자면 미사에 참여하거나 파공을 지킬 의무가 없는 날이다. 농번기에 농사일을 할 수 있어서 부담이 안가는 축일일뿐더러 고마운 축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물어도 안타깝게 기다리는 단비가 그날만은 반드시 내려준다고 믿어왔고, 실지로 그런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베드로와 바오로 세례명을 가진 신부님이나 교우들이 더욱 많았으므로 한국교회에서 첫째가는 즐거운 영영축일도 되어 주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다 사도들이다. 사도일뿐더러 사도들을 지도하고 지탱한 사도단의 양대 지주(支柱)이다.

이렇게 위대한 사도들의 축일을 따로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들이 로마에서 같은 해, 같은 날에 순교했다는 초대교회의 전통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폭군 네로 황제 때인 67년(64년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적다)에 함께 순교하였다.

바오로는 로마 성밖, 현재의 성 바오로 대성전 근처에서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고, 베드로는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진 옛 바티깐 언덕에서 로마시민이 못된다고 해서 치욕의 십자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히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같은 날에 지내게된 데는 더 크고 중요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과 특징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두 상징적인 존재이다. 베드로는 일치의 상징이다. 이를 위해 그에게 수위권이 부여됨으로써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반면에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를 좁은 유대교에서 해방시켜 멀리 세계땅끝까지 전파할 사명이 주어짐으로써 진보와 개방의 상징이 되고 있다.

교회는 하나이다. 그런데 바오로에 의해 여러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이 교회가 비로소 가톨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인 교회 일치에 긴장과 불안을 초래하였다.

베드로는 말하자면 보수주의자이다. 전통에 의거하여 교회일치를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바오로는 진보주의자이다. 교회를 좁은 세계에서 넓은 새 세계로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협조함으로써 일치속의 다양성, 전통 속의 쇄신, 안정 속의 개혁이란 이상적인 교회상을 심어나갔다. 교회는 베드로(보수)적이면서 동시에 바오로(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 오늘의 교회도 그들의 축일을 맞으면서 한번 새겨 보아야할 교훈일 것이다.

바오로(개종전 본 이름은 사울)는 길리기아의 타르소에서 출생, 유대 율법교육과 당시의 그리이스 교육도 함께 받았다. 열렬한 바리사이파로 그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스테파노의 처형에도 동참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마스커스로 교인을 체포하러 가던 중 갑자기 주님의 발현을 보고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다음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와 다른 신도들을 만난 후 바르나바 사도를 도우려 안티오키아로 갔다.

안티오키아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탄생한 두번째 교회였다. 그러나 전자와는 달리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되었다. 바오로는 곧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대전도여행에 나섰다.

첫번째 여행에서 그는 키프로스섬과 소아시아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고, 두번째 여행에서는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에까지 전도 하였으며 세번째 여행에서는 다시 그리이스 등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곧 체포되었고 이로써 그의 전도여행은 끝나고 만다.

이어 바오로는 가이사리아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2년을 지냈다. 바오로는 마침내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로마로 호송되었고 거기서도 2년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명의 경비병의 감시를 받았을뿐 셋집에서 모든 방문객을 맞이하면서 어느정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은 이 대목에서 바오로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는 그후 풀려나 멀리 스페인까지 갔다가 돌아와 다시 잡혀 순교하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로마의 중앙 코르소 거리에 현재 조그마한 성모성당이 있다. 그곳이 바오로가 갇혀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 그 감방이 남아 있고, 또 방 한구석 돌 기둥 위에「말씀은 묶이지 않는다」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이 구전은 물론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오로의 제자들이 하필이면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이 말을 새겨 놓았는가를 음미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바오로는 로마에서 비록 포승의 신세였을지라도 계속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몸은 묶을 수 있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까지 묶을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비록 그는 죽고 없을지라도 그가 남긴 14개 서한을 통해 2천년 동안 묶이지 않고 계속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오로의 위대함은 바로 그가 이방인의 사도였다는데 있다.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하레나 기타모세 율법에서 해방시켜야 하였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오로가 첫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안티오키아 교회에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일부 유대ㆍ그리스도교인(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하며 교회안에 큰 혼란을 일으몄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일임되었고, 한편 예루살렘의 사도회의(50년경)는 이 문제를 바오로에게 유리하게 결정하였다. 즉 이방인들은 모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하였고, 다만 우상에게 바쳤던 예물을 먹지 않는것을 일시적인 의무로 남겼다. 이로써 유대교에서의 해방이 확정적이 되었다.

베드로는 갈릴레아 지방에서 순박한 어부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세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일 먼저 그의 제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지식도 없고 성격도 성급한 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계기로 그에게 시몬 대신에 베드로(게파)란 새 이름을 지어 주면서 교회를 그 반석 위에 세우고 그 교회의 지도를 그에게 맡겼다.

베드로의 이러한 수위권은 주님의 승천 후에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는 마티아 사도를 선출케 하여 12사도의 빈 자리를 메웠고, 성신강림 후 맨 먼저 복음을 설교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기적도 제일 먼저 행하였다. 또 그는 사도회의에서 제일 먼저 발언을 하였다.

42년경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순교하였다. 이때 베드로도 잡혀 옥에 갇혔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그는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그후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50년경 사도회의에 참석자 잠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가 17년후인 67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42년에서 67년까지 25년간 베드로가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였는지는 기록의 부족으로 알 길이 없다. 25년간 내내 로마에 체류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베드로가 사도회의 때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이 분명하므로 지속적인 로마 체류로 볼 수는 없다. 어쨌든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하였고 로마교회를 다스렸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로마교회는 누가 언제 설립하였을까? 바오로는 51년 고린도에서 로마에서 추방당한 교인들을 만났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로마교회가 세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또 바오로는 57년경 고린토에서 로마인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대는 로마교회가 상당히 번창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42년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탈출, 안티오키아를 거쳐 로마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로마교회의 초대 주교로 활약했을 것이라는 초대교회의 전승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초기 로마 교인들이 베드로의 순교를 자랑으로 삼으며 그 묘소를 지켜왔다는 초대교회의 한결같은 전승이다. 이러한 전승은 최근에 실시된 발굴로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교황제대 밑의 묘소가 바로 베드로의 묘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문적으로도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첫 주교였고, 따라서 초대교황이었음은 부인될수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최석우 신부ㆍ한국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