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도자가 되었습니까”라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짓는다. 그 동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동기를 이야기하는 데는 단 한마디로 함축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수도자가 되었을까? 단 하나의 동기로서가 아니라 큰 동기, 작은 동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로 하여금 무엇을 찾게 만든 어떤 힘이 있었다. 젊은 혈기로 희망하고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배적인 사고로 비록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내 힘으로 많은 사람을 도우는 어떤 일을 크게 하리라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그토록 진한 인간의 노력으로 쌓은 사업이 번성할 때 죽을병에서 몸부림치던 40대 아저씨의 “나는 지금 살만한데 왜 죽어야 하는가?”라는 울부짖음 앞에 할 말을 잃었고 운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 생명을 살리고픈 간절한 소망아래 난 한 아이가 살게 되면 수도자가 되리라고 하느님께 약속을 드렸다. 그러나 난 40대에 그 아저씨처럼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그냥 살 수 있고 비록 그 한 아이가 살아났어도 내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하느님께서는 쩨쩨하게 날더러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실 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동기들을 완강히 거부할 용기가 없었으며, 이것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난 이런 인간적인 조건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그분이셨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맛들이는 어떤 것이 있으리라는 확신과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를 온전히 아시고 받아주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동기에서 시작되었고, 또 살아가면서 난 많은 사람을 온 우주를 늘 가슴 안에 품으면서 살기를 원하고 어떤 큰일을 하는 삶이 아닐지라도 이 순간, 순간의 삶을 보배롭게 여기면서 음미하고자 한다. 지금은 내가 이런 뜻으로 얼마 전 고성 기도의 집에서 적은 ‘수도의 길’에 관한 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새벽안개 골짜기를 맴돌 때, 짙은 숲속에서 뻐꾸기 울고
새벽을 깨우는 꼬꼬대 소리에, 찬란한 태양이 장엄한 녹음을 뚫고 솟아오르네
원추리꽃 황금빛 출렁이는 제단에서, 고운 목소리 사랑담아 부르는 노래에
님의 생명 세상을 새롭게 하네.
한 희망, 천상을 고대하며 닦는 수도의 길,
그 길이 메말라 고달프다 해도, 님의 속삭임 미풍을 타고
하늘거리는 들판에 서서 미소 지으며 순간을 살아가네
하늘에 수놓인 구름의 황홀한 이야기들에 언어가 사라지는 감미로움에 젖고
작은 풀잎 하나 생명 지닌 경이로움에 눈 뜨면서
풀벌레의 청아한 목소리에 귀 열리는 기쁨으로 하루를 밝혀가네
사랑 안에 불러주신 놀라운 은총에 잃어버린 님 찾고
보지 못한 님 뵈옵는 행복으로 또 영원을 향해 가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