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로사리오의 기원

입력일 2017-02-20 15:59:35 수정일 2017-02-20 15:59:35 발행일 1992-01-19 제 178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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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C아돌프 성모송 바치며 예수생애 묵상
도미니꼬가 보완…급속히 전파
15C말 지금의 형태로 정착
“마리아성심ㆍ구원사업에 감사”뜻 담겨
어려울 때 성모송 암송한 풍습서 유래
교황 바오로 6세는 교서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로사리오기도를 복음적 기도라 칭하면서 또한 복음의 통찰이라고도 했다. 즉 성모송을 되풀이함으로써 사슬을 만들고, 그 사슬을 따라가면서 신비로움의 묵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로사리오의 역사적 기원은 로사리오기도의 두가지 요소가 결합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로부터 로사리오 기도의 발전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있다.

14세기 말(末)로 돌아가 보자. 이때는 두세명의 교황이 동시에 다스리고 누가 진짜 교황인지 아무도 알 수 없던 시기였으며, 유럽의 거대한 분열시기였다.

이와 비슷하게 제국안에서도 두 세명의 왕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사이에는 백년전쟁이 한창이었고, 페스트는 이슬람세계로부터 위협하고 있던 유럽의 인구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런 시기에 아돌프라고 하는 한 젊은 귀족 학생이 있었다. 그는 외부로부터 신상에 위험이 닥쳤을 때, 자기 고향 에센의 소박한 사람들의 습관처럼 성모송을 되풀이하며 기도해서 도움을 얻었다.

그가 성모님께 천사의 인사를 쉰번이나 바쳐드리는 동안, 하느님이 은총으로 복음에 나온 것과 같이 예수의 전 생애가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는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하느님께서 매순간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되었다. 아돌프는 그후로 매일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예수의 생애를 묵상하였다. 그는 주님과 성모님께 찬미를 드렸고, 모든 은총에 대해 찬미의 마음이 가득한 감사를 드렸다.

그는 50번의 성모송을 외우는 그 단순하고 서민적인 기도에 「장미의 화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사랑의 꽃다발이라는 뜻으로서 귀족들이 예술적인 연애가와 성모님을 연모하는 노래를 이르던 말이었다.

아돌프는 이런 이름을 붙이는 이유를 『사랑하는 우리 성모님을 위해 50번의 성모송을 외우면서 우리는 예수님 생애의 묵상을 통해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1398년경, 아돌프는 에센지방의 트리어에 있는 카르투시오수도원에 입회했다. 1400년에 그는 여(女)제후인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에게「예수의 생애」와 「사랑하올 우리 성모님의 장미가지」라는 두가지 논문을 보냈다. 그녀는 이 두 논문을 갖고 로사리오를 통한 성서묵상을 익혔다. 이 기도로 아내나 군주로서의 어려운 상황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얻었기 때문에 마르가레테는 이 기도를 명하고 할 수 있는한 널리 보급시켰다.

1409년에 아돌프는 가장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에센지방의 트리어에 있는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 되었다. 같은해 9월 그는 힘이 다 빠져 방랑하는 학생 하나를 입회시켰다. 그가 바로 프로이센의 도미니꼬이다.

아돌프는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로사리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도미니꼬는 이 기도를 드리려고 애썼으나 정신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대림절에 그는 예수의 생애를 50번의 성모송을 따라 같은 수의 짧은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로소 그는 로사리오의 묵상을 하는데 성공했다.

아돌프는 곧 그 보조방법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묵상자료의 사본을 청해서 로사리오 기도를 더 널리 전파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 사본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도미니꼬에게 점점 더 많이 들어왔고, 몇 년 뒤에 그는 천부이상의 사본이 카르투시오 수도원으로부터 발송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돌프가 1439년에 페스트로 죽자 도미니꼬는 그의 유고를 통해 로사리오 기도를 더 심오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서쪽지방 카르투시오 수도원들로부터의 요청으로, 그는 그곳의 기도양식을 위해서 예수의 생애를 1백50문장으로 늘려 썼다. 그 와중에 도미니꼬회 알라누스데 루페 수사가 그와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설교를 통해, 성서의 귀절들과 함께 로사리오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전파했다.

그리하여 1475년 그의 모범을 따라 쾰론에서 도미니꼬회의 「로사리오 형제회」를 창설한 그의 제자들은 로사리오의 묵상을 의무로 부과했고 남독일 지방의 동료수사들은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1481년 출판된 그들 형제회의 한 책자는 오늘날의 신비 15단을 완전히 수록하고 있다.

로사리오 기도의 발전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가지가 있다.

첫째, 복음의 묵상은 예상외로 현대적이다. 그 카르투오시 수도승이 만든 문장들은 중요한 몇마디 말로 예수의 생애를 충분하게 표현하고 있다.

둘째, 성모송은 처음엔 오직 성서에 나오는 천사와 엘리사벳의 말로 되어 있었고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이 삽입되어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짓는 나약성을 인식하게 되고 성모님의 위대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생각하면서 성모님께 경의를 표한다. 성모송의 도움을 받아 묵상하고 성모 마리아의 성심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사업에 감사하는 것이다.

셋째, 에센의 아돌프는 로사리오 기도가 단순히 기도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 사랑스런 묵상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평소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우리가 한결같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로사리오기도는 믿음의 실생활속에서 한 삶의 표현이며 동시에 도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