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김대건 신부 유허와 19세기의 강경’ 학술세미나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4-09-23 04:16:00 수정일 2014-09-23 04:16:00 발행일 2014-09-28 제 291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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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조선 입국 장소는 나바위성지 아닌 충남 강경 황산포”
김 신부 조선땅 ‘첫 발’은 역사적 큰 상징성 지녀
나바위성지 순교비, 정확한 고증 없이 입국 장소 건립비처럼 와전
9월 18일 열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遺墟)와 19세기의 강경’ 학술세미나 모습. 차기진 박사는 “나바위성지의 위치는 와전됐다”고 주장했다.
18일 오후 1시 논산시 강경읍사무소 3층 회의실에서 열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遺墟)와 19세기의 강경’ 학술세미나는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조선땅 입국 정확한 장소는

첫째는, 1845년 8월 31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입국을 위해 배편 ‘라파엘호’로 출발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 일행이 1845년 10월 12일 밤 8시경 조선에 입국해 첫 발을 내디딘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둘째는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서 유숙했던 장소와 그 장소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1845년이라는 시점의 교회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한다. 1839년 기해박해의 와중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면서 조선교구는 교구 내에 교구장이 부재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1843년 12월 만주에서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성성된 페레올 주교를 박해가 몰아치는 조선땅에 입국시키기 위해 2년간 갖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 김대건 신부였으며,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1845년 10월 12일 조선 입국은 교구장과 한국인 첫 사제로서 공식적인 성무집행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대전교구 총대리 김종수 주교가 세미나 기조강연에서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첫 사제가 돼 입국한 장소는 김대건 신부의 행적을 살필 때, 그 염원의 ‘첫 발’이라는 큰 상징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바위성지 위치가 왜곡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주제발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의 1845년 입국 장소와 강경 유숙지 연구’에서 “김대건 신부 일행이 1845년 10월 12일 배를 정박시켜 입국한 장소는 현 강경읍 황산리에 해당하는 강경 황산포 인근”이라며 “따라서 나바위성당 아래로 볼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김대건 신부의 첫 입국 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며 한국교회 대표적 성지인 전주교구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성지는 강경 황산포 인근(황산리)에서 직선 거리로 2km 정도 떨어져 있어 김대건 신부의 입국 장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차기진 박사의 주장이다. 차 박사는 “김대건 신부의 입국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관련된 문헌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어디에도 나바위성지라고 볼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차 박사는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기념해 1955년 10월 12일 나바위본당에서 세운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순교비’ 뒷면의 김대건 신부 약력에 ‘1845년 10월 12일 밤 충남 황산포 부근에 상륙’으로 새겨진 문구를 인용하면서 “이 순교비는 정확한 고증도 없이 김대건 신부 일행의 입국 장소에 건립된 기념비처럼 와전돼 왔다”고 지적했다.

토론에 나선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는 1897년 강경 지역 최초의 사목자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강경본당 부지 마련을 시도하던 중 애초에 현 강경읍 옥녀봉 기슭을 후보지로 선정했지만 전북 화산리(나바위성지)에 넓은 폐가 부지를 매입해 성당을 짓게 된 것이 나바위성지의 위치가 왜곡된 시발점이라고 논증했다.

윤 신부는 “화산리에 본당을 둔 천주교회는 ‘강경본당’으로 불리어지다 1911년 대구교구 설정과 동시에 전북지역은 대구교구에 속하게 되면서 강경과는 소속 교구가 달라졌고 1955년 나바위성지에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순교비’ 제막을 계기로 현재까지의 왜곡이 진행돼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숙지 용어 사용에 문제

이날 세미나의 또 다른 초점인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일행이 머물렀던 유숙지와 관련해 차 박사는 “김대건 신부가 구순오의 집에서 유숙했다는 구순오의 증손녀 구용녀(안나)의 1965년 10월 증언은 믿을 만하고 페레올 주교의 유숙지는 문헌 기록의 묘사를 볼 때, 구순오의 집이 아닌 방 두 칸짜리 초가집으로 봐야 한다”며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유숙지는 임시 주교관이요 사제관으로 그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후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한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한편 ‘유숙’(留宿)이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점에 대해 윤종관 신부는 “유숙은 ‘머물러 잠을 잤다’는 뜻인데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고 한국인 첫 사제의 첫 성무집행이 이뤄진 장소를 유숙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축소시킨다”고 비판했다.

박지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