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저자와의 만남] 수필집「한길 사람속」펴낸 박완서씨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8-30 16:33:45 수정일 2012-08-30 16:33:45 발행일 1995-07-30 제 1964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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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분량놓고 신중하게 작업”
「삶」과「문학」전해주는 소중한 글
인간「이중성」에 대한 원숙한 사색
『소설이 한권의 책으로 묶일때에는 스스로 대견해하는 마음이 없지 않은데 여기 저기 쓴 잡문을 묶기는 망설여져요. 하지만 이번에는 넉넉한 분량을 놓고 꽤나 신중하게 골라내는 작업을 거쳤다는 걸로 다섯권이나 되는 산문집을 펴낸 염치 없음을 덜었으면 합니다』

본업인 소설이 아닌 산문집을 책으로 펴냈다는 것이「계면쩍어」변명을 한다는 박완서(엘리사벳ㆍ64)씨는 그 이유를「쏟아지는 활자공해속에서 우선 내가 자제해야 할 몫」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잡문」이라 부른 이 수필들 역시 그의 다른 소설들만큼 고통스런 창작의 산물이요 우리에게 그의 삶과 문학을 전해주는 소중한 글들이다.

「한길 사람속」이라는 제목이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저자는「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겹」을 가진 인간의「이중적인 속성」에 대한 원숙한 사색을 풀어내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속물적 근성에 대한 고발에서와 같이 저자는 우리 주변의 일상, 예컨대 노부모를 모시는 며느리, 부엌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쓰레기더미, 결혼식이 세건이나 겹친 어느 토요일 오후 같은 평범한 일상을 통해「인간이란 심연의 바닥」을 더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된「한길 사람속」에는 또 유럽과 미국, 중국과 한국의 남도에 이르는 여행기가 실려있고, 작가이기에 겪는 고통, 독서에 대한 편집적인 집착과 박경리 선생과의 이야기 등 그의 내적 외적 삶의 자취를 엿볼수 있는 글들이 함께 담겨있다.

지난 85년 가톨릭에 입교한뒤 올해까지 10년간 쌓인 신앙의 연륜은 그의 믿음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데 충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저는「날라리 신자」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영세 받던 당시에는 그 말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신념의 부족을 지칭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그저 가끔 주일미사를 빠지기도 한다는 뜻에 불과하지요.』이제 그의 삶에서「하느님」은 당연한 존재라는 말인듯 싶다.

『영세받고 노부부가 함께 미사 참례하러 집을 나서던 행복한 시절보다 오히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신을 부정했던 바로 그때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접근해갔던 것 같습니다』

그가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주위에서는 그에게 한국 가톨릭에서 가장 빈곤한 것 중 하나인 소위「가톨릭문학」을 기대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음에 따라 신자로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기고 주위에서도 많이 권합니다.』하지만 그는 간증 수준의 노골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감이 있다면 『「하느님」이라는 말이 한자도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가톨릭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을 구체화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다』고 고백한다.

올해안으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속편을 펴낼 예정이라는 저자는 더이상 연애감정을 잃어버리기 전에「감미롭기 그지없는」연애소설도 한편 쓰고 싶다고 한다.

이제 방학이어서 6명이나 되는 외손자들이 찾아오면 글을 쓸 시간도 별로 없을 것이라며 푸근하게 웃는 작가에게서는 세월의 연륜과 신앙의 경륜, 그리고 삶의 가장 쓰라린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세상에 대한 애정을 회복한 원로의 여유가 풍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