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심오한 사랑/김길수 (끝)

김길수·효대강사
입력일 2011-04-19 13:44:52 수정일 2011-04-19 13:44:52 발행일 1980-01-13 제 118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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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중에 「사랑」 이란 말만큼 깊고 넓은 호소력을 갖고 있는 단어도 드물다. 그래서 불후의 명작에서 통속소설까지 사랑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영화나 대중가요의 대부분이 사랑을 묘사하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참사랑을 만나는 기쁨은 매우 어려울 뿐만아니라 기실을 참사랑과는 정반대의 의미까지를 사랑으로 잘못 알고 그 거짓사랑에 웃고 울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구약성경을 희랍으로 당시의 세계에 뻗어 나갔다. 그것은 세속적인 용법과 대조적으로 사용된 「아가페」 라는 말이었다. 사실 「에로스」 라는 말은 마치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이 가끔 저속한 욕망의 교환에 사용되듯 단순한 감각적이며 이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신약에서 「에로스」 라는 말이 전혀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리스도적 사랑은 저속한 본능적 감정에서 해방된 「아가페」 의 기쁜소식으로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이 천상적인 「아가페」가 사랑의 지상적인 성격은 무엇이나 배제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순수하고 이기심이 없고 저속한 감정에서 벗어난 것이라해서 인간이 서로 느끼는 매력과 그리움이 무가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그인간적인 사랑안에 들어와서그것을 더욱 높은 신적인 사랑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는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이 동질의 것임을 역설하고 인간이 발을 최후의 심판이 대인관계의 사랑임을 말해주고있다. (마태오25 ㆍ41~45) 이때 우리의 주님은 헐벗고 긂주린 사람 여행하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우리주변에 언제나 만날 수있는 그런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은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 이며 『제눈으로보는 형제를 사랑하지않는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수 있겠는가!』 라고 하시어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대인관계의 사랑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척도임을 말해주고있다. 이렇게 인간상호간의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놀랍고 새로운 계시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하느님께 감히 「너」 로서의 상대역이 될 수 있도록 승화된 것이요, 이 사랑의 심오성이 인간소외의 논리가 일반화된 현대와 「타인이 나의 지옥」 인 의식의 장애를 넘어서서 이웃 안에서 이웃을 통해 천국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肉化의 신비에서 보여준 천주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함은 바로 그 모습처럼 『肉化한 말씀』 이신 천주 제2위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하는님과 인류의 일치라는 사랑의 신비로 죽음을 극복한 영원한 삶의 나라인 하는님의 나라를 완성하게 할 것이다. 이 영원한 사랑의 삶인 생명의 나라를 완성하게 할 것이다. 이 영원한 사랑의 삶인 생명의 나라는 또한 이웃사랑을 통해 현세에서도 신비롭게 발견되는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속에 그대로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요한3 ㆍ 14) 이제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불안은 사랑의 의의와 새로운 국면의 가치를 끊임없이 재발견하여 매일의 생활에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끝>

김길수·효대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