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지난 2월 17일, 교통사고로 선종하신 김병엽 신부에 대한 추도사로 대신하려고 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분의 명복을 밤늦도록 빌었다. 그리고 그분의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 그분과 나와의 관계는 짧았다. 그러나 짧았던 만큼 행복했고 베풀어 주셨던 작은 일들이 고운 향기로 가슴에 남아 있다.
신부님은 작달막한 키에 작은 체구였다. 조용하면서도 눈망울이 촉촉히 젖어 있던 분이셨다. 나는 그런 신부님에게서 현실의 슬픔에 고뇌하는 사제의 성스러운 모습을 발견했었다.
신부님은 나와 동갑이었고 세례명도 같은 베드로였다.
딱 한번 서로가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편지는 한 동안 서로 주고받았다.
내가 신부님을 알게 된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그분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겉봉을 보니 전북 완주라고 씌어 있었고 보낸 이는 삼례읍본당 주임신부님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나에게 편지를 보내주신 김병엽 신부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고는 편지의 겉봉을 뜯어서 읽었다. 거기에 씌어진 글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일전에 가톨릭신문에 내가 쓴 「세뱃돈에 얽힌 행복론」이란 글을 읽고 무척 기뻤다는 것과 자기도 내년에는 사목위원들에게 세뱃돈을 천 원씩 꼭 나눠 주겠다는 이야기며 보신탕을 기막히게 하는 곳이 있으니 한 잔하게 꼭 들러 달라는 말씀이었다.
무척 소박한 정이 듬뿍 담긴 글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소주를 나누며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후 반년이 지나서 문학인들의 세미나가 전주에서 있기에 가는 길에 찾아가 뵈었다. 갑자기 찾아 간 나를 대번에 알아보고 아주 옛 얼굴을 대하듯 반가이 맞아주셨다.
우리는 사제관에서 포도주를 곁들인 점심을 나누고 헤어졌다. 신부님께서 병자성사 때문에 움직이셔야 했고 나도 두 시간 안으로 호텔로 돌아가 세미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런 까닭으로 신부님과 나의 만남은 짧은 시간으로 끝났다.
신부님은 끝내 보신탕을 함께 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그분은 사무장을 불러 어느 새 이야기를 해놓았는지 전주까지 가는 택시를 오게 했고 사제관을 나설 무렵에는 내 손에 자그마한 종이 꾸러미를 쥐어 주셨다.
열흘 전에 북유럽을 다녀왔으면서 언젠가 만나면 주려고 모자 하나 사왔다며 내 머리에 그 모자를 씌워줬다. 모자가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순간 신부님의 입에서는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드로 회장님. 정말 맞춘 것처럼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 골라주시기에 샀더니만 어쩌면 이렇게 잘 맞습니까?…핫 핫 핫』
내 눈시울을 뜨거운 눈물로 적셔 줄만큼 정이 많던 그분…. 그분을 보내면서 나는 나의 작은 기도 방에서 오래도록 고개를 숙인 채 짧고도 행복했던 회상에 젖어 슬픈 시간에 나를 묻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병엽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