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설 때면 불꽃같은 카리스마와 시원한 발성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무대를 벗어난 모습도 그럴까? 약속시간 15분 전에 도착해 인터뷰를 준비하는 모습은 우선 신뢰감부터 안겨줬다.
이번 달 ‘스타 토크 & Talk’ 주인공은 재능과 끼, 성실함까지 스타급으로 인정받는 뮤지컬 배우 이건명(리카르도·38)씨다. 뮤지컬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도 렌트의 ‘마크’, 맘마미아의 ‘스카이’, 미스사이공의 ‘존’, 틱틱붐의 ‘존’ 등등의 이름을 대면 ‘아하 그 배우!’라며 무릎을 친다. 2001년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상에 이어 이듬해 인기스타상을 받으며 한국 뮤지컬계에 활력을 더해온 배우, 데뷔 14년차의 관록을 톡톡히 발산하고 있는 이 씨를 만나봤다.
최근 국내 뮤지컬시장은 가장 급성장한 대중문화산업이라는 명성을 꿰찼다. 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스타로 등극하고, 대학마다 뮤지컬학과가 개설되고, 뮤지컬전용극장도 등장했다. 일찌감치 뮤지컬 배우로서 자질을 키워가는 청소년들도 크게 늘었고, 인기 가수나 탤런트 등도 뮤지컬계에서 역량을 펼치고 싶어 한다.
이 씨는 그야말로 ‘운명처럼’ 뮤지컬에 눈을 떴다.
어릴 때부터 오락부장과 응원단장 등은 도맡아할 만큼 끼가 다분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선 그룹사운드 활동도 했다. 무대에 설 일도 없는데 춤연습은 또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기 좋아한 이 씨는 공부를 썩 잘하는 이른바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친구가 권유했다. “넌 재능이 있으니까 연극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 거야.”
그 한마디에 학교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던 그는 길거리에서 할인권을 얻은 김에 소극장엘 들어갔다.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이 공연되고 있었다.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매일같이 즐기던 춤과 노래, 게다가 연기까지 한 무대에 녹아들어 있었다. 내 모든 열정을 다 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곧바로 달려와 성악가였던 삼촌에게 발성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훤칠한 키와 이목구비, 타고난 목소리와 발성, 유연한 몸놀림, 게다가 남들보다 두어 발짝 빨리 진로를 정하고 연습한 강한 의지 덕분에 그는 뮤지컬계에서도 빨리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삶이 무대조명처럼 환히 빛난 것만은 아니었다. IMF 여파로 공연무대의 불이 대부분 꺼졌을 땐, 할 일이 없는 자신이 사회에서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최근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끝낸 후에도 몇 개 공연이 무산되거나 출연이 취소돼 마음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굴곡이 나를 키운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커튼콜이 이어질 때면 가슴이 터질듯 행복을 느낍니다. 배우로서 느끼는 최고의 기분이지요. 그럴 땐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잘 해야겠다’라는 생각만 남습니다.”
재능 못지않게 성실함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이 씨는 현재 뮤지컬학과 석사과정도 밟고 있다. 뮤지컬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 깊어질수록 책임감 또한 무거워졌다. ‘한창 잘 나가는 배우’로서 경력을 더 쌓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국내 뮤지컬과 후배들을 더욱 탄탄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데에도 힘을 쏟고 싶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 결정하고, 그 후엔 ‘걸을 것’이 아니라 ‘달리길’ 바란다”고 조언한다.
실제 뮤지컬 배우는 다른 삶보다 더욱 힘들다. 온갖 노래와 춤, 연기까지 소화해야 하는 뮤지컬 무대는 매일이 전쟁이다. 어제는 어깨동무를 하며 동고동락을 나누던 동료들도 오늘은 경쟁자로 오디션 무대에 서야 한다. 기존에 인정받은 배우도 매번 공연마다 오디션을 거쳐야 발탁될 수 있다.
“재능과 끼만 믿고 덤빈다면 결코 성공하기 힘듭니다. 성실한 노력이 최대 과제이고, 노력은 꼭 보답을 가져옵니다.”
교과서적인 대답같이 느껴졌다. 그러자 이 씨는 “교과서가 바로 정답입니다. 정답을 담은 것이 교과서 아닌가요?”라고 반문한다. 특히 이 씨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항상 ‘배우로서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뮤지컬에 대한, 관객에 대한 ‘진실된 마음’ 한 뼘 차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하느님도 그저 내가 ‘평생 비빌 언덕’이라고 잘못 생각했었어요. 아플 때 찾는 병원, 피곤할 때 찾는 피로회복제처럼요. 이젠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 분이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한다고 벌을 받을까 봐 아예 기도를 안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이젠 틈만 나면 화살기도로 대화하는 자신만의 기도법도 터득했다고.
“문화예술과 함께하는 삶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뮤지컬 배우는 행복지수가 높은 직업 중 하나지요. 이러한 직업을 밑거름으로 세상에 활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연습실이 아닌 카페에서 편안하게 마주한 그는 말을 썩 잘하는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업체 등에 특별강연도 자주 다닌단다.
이 씨는 10월 26일 열리는 한국뮤지컬대상에선 남우조연상 후보로도 올라 있다. 석사과정을 마치면 곧바로 미국 연수도 계획 중이다. 늘 새로운 도전을 서슴지 않는 그가 뮤지컬계에 어떤 역사를 써나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