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이 ‘혼돈의 섬’으로
마을 주민들, 갈등·반목으로 큰 상처입어
제주교구 반대 성명·사제단 단식기도 실시
보상 계획 전무…“여론몰이 통과는 곤란”
[전문] 지난 2005년, 오랫동안 유배의 땅이었고, 근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이었던 4.3 사건의 현장이었던 제주는 이른바 ‘평화의 섬’으로 선포됐다. 2년 뒤인 2007년 섬은 군사기지 설치를 둘러싸고, 혼란의 땅이 되고 있었다.
여전히 ‘평화의 섬’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어떻게 그 평화를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에서 많은 이들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제주를 직접 찾아갔다.
분란에 휩싸인 강정마을
“어촌 계원은 찬성이지. 해녀들도 찬성하는데.”
5월 26일 제주 대천동 강정마을. 출항준비를 하던 어부 윤모씨(70)씨는 해군기지 유치에 대해 묻자 바로 ‘찬성’이라고 했다.
“여기가 생활여건도 안 좋고 개발도 덜 되어서 살기가 힘들어. 100% 좋진 않겠지만 해녀 직업도 보장해 준다니 찬성이지.”
보상금도 준다고 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 하지만 그 역시 이번 일로 빚어진 갈등을 크게 걱정했다.
“해군기지 문제가 결판이 나야 마을주민들끼리 분란이 없을텐데 이미 서로 상처를 입어 해군기지가 유치돼도 걱정, 안돼도 걱정이야.”
강정해군기지유치반대추진위원회 위원장 양홍찬(51)씨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토론회부터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여론몰이로 통과시켜버렸다”며 “다른 지역에서는 몇 년이나 끈 문제가 이렇게 빨리 해결됐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후보지는 그동안 안덕면 화순지역, 남원읍 위미지역을 거쳐 지난 14일 대천동 강정마을로 최종 결정됐다. 그는 “현재 해군은 보상에 대한 계획도 전무한 상태”라며 “기지가 들어선 곳은 땅 값도 떨어지고 노인들만 있게 돼 오히려 경제가 낙후된다”고 말했다.
그는 강정마을회에 설명회와 공청회, 전국 해군기지 조사 실시와 보고, 주민투표 실시 등의 요구사항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했는데 아직도 답이 없다”며 “물리력 행사까지 각오하고 있다”고 했다.
강정마을을 오기 전 위미를 들러 만난 해녀 김계정(58)씨의 말이 떠올랐다. “우린 주민들이 혈서도 쓰고 삭발도 했어. 삶의 터전을 뺏길 순 없잖아. 지금은 발 뻗고 자서 좋지.”
해군기지 유치 문제는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제주도민들의 삶을 갉아 먹고 있었다.
이미 해묵은 논란
제주 해군기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는 이미 5년째. 해군은 기지의 실체나 규모 등을 정확히 밝히지 않았고, 2005년에서야 기지가 7천t급 이지스함이 정박하는 전략기지임이 드러났다.
처음으로 해군기지 건설 계획이 드러난 2002년, 해군은 기지의 규모가 ‘간이부두’ 정도에 불과하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도의회 설명회에서 별도 군부대가 함께 들어온다는 것이 드러났고, 올해 1월과 3월 두 차례의 토론회를 통해 공론화됐다.
5월 14일. 김태환 제주도지사가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공식 요청한 해군기지 건설에 동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제주교구 사제단은 5월 18일 단식을 시작했다.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하는 평화기도회’를 마친 후 총대리 김창훈 신부를 비롯한 5명의 사제가 우선적으로 단식에 참여했고 이후 그 수는 25명으로 불어났다.
제주특별자치도가 발행하는 ‘다이내믹 제주’ 5월 20일자에 ‘해군기지 후보지 대천동 강정지역 동의 결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5월 11, 12일 도민 전체 1500명을 대상으로 유치 여부를 묻는 설문 결과 유치 찬성 54.3%, 반대 38.2%로 찬성 비율이 많았다는 것이다.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졌다. 불특정 도민 1500명을 통한 여론조사로 인해 도의 미래가 결정지어졌다.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천주교회로부터의 강력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평화의 섬’이어야 할 제주
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5월 21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제2차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하는 평화기도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에 앞서 발표한 첫 번째 성명은 이번 일을 둘러싼 제주교구, 곧 천주교회의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뿐만 아니라, 제주가 품고 있는 아픈 상처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대적, 지역적 소명에 대한 성찰까지도 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평화의 섬’이라는, 제주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강주교는 성명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 무력 사용의 문제, 가공할 현대 무기의 파괴력, 그리고 평화를 빙자한 군비경쟁의 허구성을 섣부른 군사 기지 건설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제주의 땅이 지닌 역사적 상처로서 4.3사건을 언급하며, “무기나 무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참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도 이 점이 지적됐다.
사실 ‘평화의 섬’으로서 제주에 대해서는 노대통령이 직접, 2005년 1월 27일 ‘제주 세계 평화의 섬’ 지정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선포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평화의 섬’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 세계의 평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다.
결국 제주는 자타 공히 ‘평화의 섬’으로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은 ‘평화의 기지’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주교구가 교구장 담화와 사제단 성명 등을 통해 주장하는 평화로운 제주의 이상은 결코 독단이 아니었다.
찢겨진 마음들, 고통스러운 갈등
해군기지 설치에 더해 제주는 폭탄을 하나 더 맞았다. 25일 한미 FTA 협정문이 공개된 가운데 이번 협상의 최대 피해자가 제주농업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 특산물인 감귤이 특별 세이프가드 발동 품목에서 배제돼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이에 대해 교구 사무처장 겸 관리국장인 윤성남 신부는 “도민들에게 감귤산업이 무너진다는 소식은 큰 충격”이라며 “해군기지 유치가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은 이들을 충분히 호도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현안들을 이끌고 해결해야할 김태환 도지사는 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고 시민단체 등에 의해 주민소환 대상자로도 검토되고 있다. 지난 2005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는 현재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한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다.
가까스로 이어가던 단식을 중단한 제주교구 사제단. 중단 하루 뒤인 5월 25일 사제단은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일주일간의 단식으로 사제들은 팔에 링거 바늘을 꽃아야 했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후보지로 결정된 강정마을 주민들의 얼굴들도 사제단과 다를 바 없었다.
사제단은 “조용한 단식기도에 머무르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평화의 섬 수호 특별위원회’라는 명칭의 기구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제주교구 사목국장 고병수 신부는 “특별위원회 설치는 그간 교회가 지역 현안에 대해 무심했음을 드러내는 뜻이기도 하다”며 “앞으로 이 기구를 통해 환경, 인권 등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천혜자원 오염 불보듯”
■제주교구 총대리 김창훈 신부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을 비롯해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을 통해 전쟁과 군비의 증강, 경쟁을 반대하고 군비축소를 전 세계에 촉구해왔습니다.”
제주교구 총대리 김창훈 신부는 본보와 가진 서면 인터뷰를 통해 제주도 해군기지유치 불가에 대한 당위성을 밝혔다.
김신부는 “정부는 2005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해 놓고 군사기지를 설치하겠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교구 사제단은 도민과 함께 제주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군기지가 들어선 후의 제주의 모습은 가공할만큼 위협적이라고 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이지스구축함이 배치되는데, 군함의 정박과 운영관리로 인해 한국의 어느 군항보다 더 큰 군항이 축조될 것”이라며 “유네스코 자연유산등재 후보지이며 전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천혜의 관광지인 제주의 자연은 오염되고 황폐화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신부는 해군기지유치에 대한 교구 사제단의 대처방안을 내놓았다. “사제단은 각본당과 단체에서 평화에 대한 사회교리를 가르쳐 교회의 정신을 심어주고 비신자들에게도 전파, 지속적인 평화기도회를 실시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는 특별위원회 설치를 언급했다.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 ‘평화의섬 수호 특별위원회’를 설치할 겁니다. 이를 통해 군사기지를 설치하려는 국방계획을 수정하도록 도민과 함께 정부에 촉구할 것입니다.”
또 김신부는 “도민의 동의를 얻어서 결정한다면 안보를 이유로 주민투표를 금지하는 비민주적인 법규를 개정해 신뢰성과 객관성이 보장되는 주민투표의 방법을 채택하도록 촉구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아쉬운 점을 털어 놓았다. “교회는 그동안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참 평화의 실현을 위한 전쟁예방, 군비축소 등에 대해 관심이 적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해보게 된다”며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해군기지유치와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 각 교구의 많은 지지와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에 초입에 내걸린 현수막들. 해군기지 유치 찬반을 주장하는 현수막이 각각 걸려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주교구 사제단은 해군기지 건설 유치를 반대하며 일주일간 단식기도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