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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8)도앙골성지, 귀국 후 첫 서한 작성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2-02-22 수정일 2022-02-22 발행일 2022-02-27 제 328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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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위협에도 하느님 뜻에 온전히 의탁

깊고 험한 산속에 위치한 교우촌
척박한 땅에서 담배와 조 경작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에 감화
가는 곳마다 닥친 박해를 세세히 기록
하느님 섭리 따르겠다는 각오도 담아

도앙골성지 야외 제대 모습. 대전교구 가톨릭사진가회 제공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서한에서)

최양업은 1849년 12월 하순 귀국한 후, 이듬해 6월까지 여섯 달 동안 충청·전라·경상·경기·강원 등 전국 5개 도를 돌면서 성사를 베풀었다. 6개월 동안 무려 5000리(2만㎞)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한 최양업은 충남 부여 도앙골(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에서 7월 한 달 동안 고된 여정을 잠시 쉬었다. 그리고 10월, 귀국한 후 첫 서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를 이곳에서 작성했다.

최 신부의 초기 사목 중심지

최양업이 귀국 초기 사목 중심지로 삼았던 도앙골에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전교 활동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이존창은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충청도 홍산으로 몸을 피해 열심한 전교활동을 펼쳤고, 이로써 홍산 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터전이 됐다. 이처럼 홍산의 신자들이 이룬 신앙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 도앙골이다.

도앙골이라는 이름은 봄철이 되어 계곡 물을 따라 가득 피어나는 붉은 복사꽃에서 유래한다. 계곡을 굽이쳐 피는 복사꽃 향기가 일대를 가득 채운다 하여 ‘도원곡’(桃園谷 또는 桃花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보령과 부여, 서천이 맞닿은 월명산 아래, 산길이 모아지는 해발 250m 계곡 끄트머리에 자리한 도앙골은 산세가 깊고 험해 박해를 피하기에 맞춤이었다. 도앙골을 품고 있는 월명산 산길은 세 지역의 산골에 숨어 살던 교우들이 연통하기 수월하게 맞닿아 있다. 특히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삽티 교우촌(부여군 홍산면 상천리)과는 현재 약 3㎞의 도보 순례길이 조성돼 있기도 하다.

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

열심한 교우촌과 박해의 위협

최양업은 산속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습에 감화돼 서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이를 반증하듯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김사범과 김루카, 김바오로, 오요한, 오시몬 등 도앙골 출신 다섯 명이 체포돼 공주감영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최양업은 도앙골에서 쓴 편지에서 이처럼 자신과 교우들을 항상 따라 다니는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세세하게 적었다. 마을 사람들이 최양업 일행을 잡아 죽일 방도를 논의했고, 하루 종일 욕설과 저주, 협박을 퍼붓기도 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머물던 마을을 도망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최양업과 교우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오직 하느님의 섭리를 따를 각오였다고 서한은 전한다.

“우리는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있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온 마을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도망을 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집에 대해서도 마을 사람들의 성을 돋우어 광분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도앙골성지 개발 노력

현재 도앙골성지(전담 맹세영 요한 세례자 신부)는 최양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이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이 요청된다.

대전교구는 2011년 12월 22일 도앙골에 최양업의 시성을 바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제막식은 전임 대전교구장 경갑룡(요셉) 주교가 주례했으며, 기념비에는 당시 해미성지 주임 백성수(시몬) 신부의 글씨로 ‘鐸德 崔良業 諡聖祈願碑’(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라고 한자로 새겨졌다. 기원비는 높이 약 7.5m(비석 머리 포함)로 비석 몸체와 머리, 받침 등을 모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