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7년에 걸친 귀국 여정, 실패와 좌절 속에서 순명을 기억하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1-11 수정일 2022-01-12 발행일 2022-01-16 제 3278호 1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조선의 복음화 향한 간절한 마음 하늘에 닿아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 받는 중에도
포교에 대한 열망으로 귀국을 염원
부제수품 후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

상해서 사제품 받은 그해 12월 입국
7년 만에 조선 신자들을 만난 감격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담겨

최양업과 김대건이 공부했던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옛날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경기도 남양 출신 최방제(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다락골 출신 최양업(토마스),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 김대건(안드레아). 1836년 12월 2일, 모방 신부가 지내던 서울 후동(현 중구 주교동ㆍ산림동) 사제관에 모인 신학생 3명은 성경에 손을 얹고 ‘조선 천주교회의 장상이 되실 분들에게 순종하고 순명할 것’을 서약했다. 조선교회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된 세 사람은 십자고상 앞에서 맹세한 이 서약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한 씨앗이 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씨앗은 그렇게 서울 후동의 작은 사제관에서 뿌려졌다.

사제가 되기 위한 여정 가운데서도 귀국의 꿈 키워

서약 이튿날인 12월 3일 교회 밀사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한 세 사람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말 무렵 봉황성 변문(현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에 도착해 조선대목구 선교사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샤스탕 신부를 변문까지 안내해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따라 중국으로 향한 세 사람은 몇 달을 걸어간 끝에, 다음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세 사람. 그 여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5개월 남짓 되던 11월 27일, 최방제가 위열병에 걸쳐 선종했다. 게다가 아편 거래로 인해 광동과 마카오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필리핀으로 피신을 해야 할 상황과 맞닥뜨렸다. 1839년 5월 3일부터 11월 중순까지 필리핀 마닐라 북쪽에 있는 롤롬보이 농장에 머물렀던 두 사람은 아픔을 뒤로 한 채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에 전념했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4년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최양업과 김대건에게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1841년 12월, 프랑스 극동 함대 세실 사령관이 리브와 신부를 찾아와 통역자 파견을 부탁한 것이다. 리브와 신부는 1842년 2월 1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전한다.

“세실씨가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제게 통역 한 사람을 청했습니다. 저는 그 청을 하느님의 섭리로 생각하고, 세실씨에게 우리 학생 중 한 명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세실씨에게 한 명의 통역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조선 포교지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그 포교지를 돌보도록 그곳으로 누군가를 입국시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실 사령관이 지휘하는 에리곤호에 승선한 사람은 김대건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병을 앓고 있는 김대건이 에리곤호의 의사에게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이다. 5개월 뒤인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통역 자격으로 파즈 함장이 지휘하는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난다. 하지만 세실 사령관은 얼마 뒤 조선 원정 계획을 포기했고, 이에 최양업과 김대건도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요동으로 가서 입국 기회를 엿보기로 결정한다. 요동에서 백가점 교우촌(현 요녕성 장하시)을 거쳐 팔가자(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팔가자촌)의 소팔가자 성당에 도착한 최양업은 1844년 12월 이곳에서 부제품을 받는다.

입국길에 오른 지 7여년 만에 조선땅을 밟다

부제가 된 최양업의 귀국을 위한 노력은 더욱 간절해진다. 1846년 2월 중국 훈춘에서 귀국을 시도했으나 중국 관원들에게 체포돼 실패했고, 그해 12월 말 변문을 통해 조선에 가려 했으나 국경 감시가 엄중해진 탓에 또다시 귀국이 좌절된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되면서 거처를 옮긴 최양업은 1847년 7월 30일 프랑스 해군 대령 라피에르가 지휘하는 글로와르호를 타고 바닷길을 통해 귀국을 시도했다. 귀국만을 염원하며 10여일 넘게 항해했으나 8월 10일, 배가 고군산도 인근에서 좌초돼 신시도에 상륙한다. 결국 다시 배를 돌려 상하이로 돌아온 최양업. 2년 뒤인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은 그해 12월 변문을 통해 입국에 성공했다. 입국을 시도한 지 7여년 만의 일이다. 이듬해 10월 충남 부여 도앙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서한에서 최양업은 “저의 가련한 조국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형제들에 대해 사랑하올 신부님들께 편지를 쓸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왔습니다”라고 기쁜 마음을 전한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