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수녀들의 JPIC 활동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2-01-11 수정일 2022-01-11 발행일 2022-01-16 제 3278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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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가장 먼저 맞서는 예언자들… 하느님 나라 위한 봉헌의 삶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한국교회·사회에 실현하고자 갈등의 현장마다 적극 나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수도회 고유 카리스마 살리고 시대 요청 식별하는 삶의 방식

2019년 8월 14일 제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 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수도자들. 수도자들은 불의에 맞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오늘날 교회의 사회 참여를 지칭하는 개념은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JPIC,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이다. JPIC는 사도직 활동의 요체를 시대적 요청에 민감한 예언자적 역할에서 찾고 있는 수도자, 특히 여성 수도자들에 의해 교회 안에 보편화됐다. 여성 수도자들은 왜 JPIC를 자신들의 쇄신된 역할로 여기는지 생각해본다.

여전히 바람이 차가웠던 지난 1월 7일 대전 대흥동 가톨릭문화회관 앞. 초록 바탕, 흰 바탕, 혹은 마분지 위에 빼곡히 쓰인 간절한 호소들이 길 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푸른 하늘 위해 석탄 발전 멈추세요,’ ‘탈석탄 기후정의 넷제로(net zero),’ ‘탈석탄이 지구를 살린다,’ ‘기후위기 지금 말하고 당장 행동합시다’ 등등.

기후행동에 나선 이들이 홀로, 둘이서, 혹은 삼삼오오 모여서 지구를 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 틈에는 단정하게 수도복을 갖춘 여성 수도자들이 끼어 있다. 매주 금요일 같은 시간, 세종 정부종합청사 인사혁신처 사거리에서도,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과 대형 백화점 인근에서도, 그리고 서울 광화문에서도 영락없이 수녀들을 만날 수 있다.

여성 수도자들을 상상할 때, 우리는 대개 다소곳한 몸짓으로 성당 안에서 기도를 바치고, 병자를 돌보며, 부모 잃은 아이들을 어머니처럼 도닥이는, 거룩하고 단아한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지난 십 수년간 수많은 사회 현장에서 수녀들이 고유한 복장을 드러내며 우리 사회 정의와 평화, 생명과 생태환경 수호를 크게 소리치는 모습을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다.

■ 불의의 현장에서 만나는 수녀들

수도자들이 불의의 현장에 함께한 것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는 끊임없이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했고, 수도자들은 사제와 평신도들과 함께 그 현장에 함께했다.

공의회 정신이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한국 사회는 독재 정권에 의해 민주적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정의는 무너졌으며 인권유린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교회는 정치 민주화의 최전선에서 투쟁했고 불의를 폭로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성 수도자들 역시 그 안에 몸담았지만 엄밀하게 볼 때, 당시 사제단과 평신도들의 사회 참여가 두드러졌고 상대적으로 수도자들의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이후 정치 민주화가 이뤄지고 교회는 민주화 운동 보루로서의 평판과 신뢰를 바탕으로 고도성장을 했다. 이후 보수화와 중산층화가 진행되고 교회의 사회적 관심과 참여는 약화됐다. 이 시기 사회적 참여는 생명운동과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진보적 사회 참여는 미미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이래, 약 10년간의 보수적, 권위주의적 정권에서 교회 안의 진보적 사회 참여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는 여성 수도자들의 적극적 사회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 흐름이 이른바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JPIC)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 여성 수도자의 적극적 사회 참여

2008년부터 이어진 보수적 정권 하에서 여성 수도자들은 사회적 갈등의 현장으로 나섰다. 광우병 촛불 집회를 시작으로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밀양 송전탑 건설, 탈핵,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그리고 세월호까지…. 불의가 자행되는 사회 현장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연대 요청을 받았다. 응답 과정에서 여성 수도자들은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이하 장상연)를 중심으로 조직적 대응에 나섰고, JPIC 조직이 확장되고 네트워크가 강화됐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원회는 2014년 제9회 가톨릭 환경상 대상을 밀양과 청도, 강정의 수녀들에게 줬다. 대상 수상자로 결정된 장상연 생명평화분과에 대해 환경소위는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현장,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건설 현장 등에서 하느님의 창조질서보전과 인간애를 지키는 사도직을 용감히 수행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수녀들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 4대강 개발 중단을 촉구하는 기도회, 탈핵을 희망하는 국토 도보 순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범국민적인 촛불 집회, 광화문 광장에서 이어진 세월호 미사….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19년 8월 14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도자들이 제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예언자적 역할의 식별

여성 수도자들이 수도원과 성당을 벗어나 현장으로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사목회의에서 수도자 문제를 논의하며 수도자의 정체성과 역할, 사도직의 쇄신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됐다. 수도생활 쇄신에 대한 고민은 창립자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 고유한 카리스마를 살릴 것과 시대적 요청에 민감하게 부응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요청했다.

식별 과정을 거쳐 여성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본질적 사명이 ‘예언자적 역할’임을 인식했다. 2008년 이후 약 10년 동안 여성 수도자들은 이 시대의 사도직이 사회 참여, 즉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JPIC) 활동임을 자각했다.

여성 수도자들의 JPIC 활동은 개별 수도회 차원에서보다는 장상연에 의해 조직화됐다. JPIC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사목분과(이후 생명평화분과)를 중심으로 전담자가 파견돼 전문성과 집중력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외부와의 연대와 네트워크가 강화됐다. 자연스럽게 각 수도회에도 관련 활동가가 양성되고 임명됐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을 통칭하는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 즉 JPIC가 여성 수도자들의 사회 참여를 의미하게 됐다.

■ 여성 수도자들의 JPIC 확대

JPIC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공의회 이후 1966년부터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상호 교류 속에서 사회정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JPIC는 장로교 연합인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서 처음 제안했고 밴쿠버에서 열린 WCC총회에서 채택됐다.

1990년 JPIC 서울 세계대회가 열리고 여기에 가톨릭교회도 참가하면서 한국에도 JPIC가 알려진다. 특히 이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 것은 분단국가라는 한국의 상황, 개발독재에 의한 환경파괴 문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대회를 통해 가톨릭교회의 사회운동은 기존의 정의 평화에 생태환경에 대한 개념을 더해 정의평화생태로 패러다임이 확장된다.

하지만 이후 JPIC 운동은 활력을 잃었고, 유럽에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를 중심으로 소규모로 운영돼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한국에서는 작은형제회를 중심으로 정의평화창조보전(약칭 정평창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다가 여성 수도자들의 사회 참여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JPIC 명칭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오늘날 한국교회 여성 수도회들은 JPIC 활동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봉헌된 삶의 새로운 사도직 역할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세상과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닌 창설자들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교회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시대의 요청을 식별하여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들 삶의 가장 유력한 방식으로 여긴다. 또한 그러한 삶의 투신은 오롯이 수도자들만의 것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몫이기도 하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