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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 특집] ‘영혼의 안식처’ 남한산성순교성지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1-11-09 수정일 2021-11-09 발행일 2021-11-14 제 3269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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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난 순교자 영혼 보듬었던 참 신앙인, 그 숨결 영원히
신분 탄로날 위험 무릅쓰고 순교자 시신 수습한 복자 한덕운
잔혹한 ‘백지사’ 형벌 고통에도 주님을 놓지 않았던 순교자들
숭고한 신앙심이 성지 곳곳에

11월 4일 남한산성순교성지를 찾은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11월 위령 성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영혼의 안식을 얻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살아있는 이들도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묵상하게 된다.

지난 2005년 9월 ‘영혼의 안식처’로 선포돼 위령 성월의 의미를 깊이 느끼고 순례할 수 있는 남한산성순교성지(전담 김유곤 신부)를 찾았다.

■ ‘영혼의 안식처’가 된 성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위치한 남한산성순교성지 주변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남한산성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산성 축조기술 변천사 등 세계적인 역사·문화적 가치가 인정돼 2014년 7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코로나19 상황에도 불구하고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려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남한산성에 끊이지 않는 이유다.

남한산성도립공원 이정표가 보이는 곳에서 꼬불꼬불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상점들이 즐비한 곳에 시선이 머문다.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남한산성순교성지 성당이다. 성당 입구 앞에는 높이 4m가 넘는 하얀 돌에 ‘순교자현양비’라고 새겨져 있어 남한산성순교성지가 순교자를 기리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성당 정문 기둥에 ‘영혼의 안식처’라고 쓰인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성당에는 은은한 레퀴엠 선율이 흐르고 있어 음악만으로도 안식이 전해지면서 순례자들의 마음은 차분해진다.

남한산성순교성지가 영혼의 안식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산성순교성지 첫 순교자인 한덕운(토마스, 1752~1802) 복자가 먼저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순교자의 영혼을 위로했던 신앙과 정신을 본받자는 뜻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 한덕운 복자와 남한산성의 순교자들

남한산성은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로서 외세의 침략에 맞선 결사항전의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교회사에서는 신해박해(1791년)부터 시작해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를 거치는 동안 30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한 거룩한 장소다. 지금의 남한산성순교성지는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이 고초를 겪었던 터전 위에 세워졌다.

순교자현양비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순교성지 순교자 300여 명 중 이름과 행적이 알려진 이는 첫 순교자 한덕운 복자를 비롯해 김덕심(아우구스티노), 김윤심(베드로), 김성희(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 등 36명에 불과하다.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순교자들이 훨씬 많다.

남한산성순교성지 순교자들 중 상징적 존재인 한덕운 복자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800년 10월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이듬해 신유박해로 신자들이 순교하고 있다는 소식이 광주에 전해지자 옹기장사꾼으로 변장하고 한양에 올라갔다. 박해의 와중에 신자들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덕운은 한양 청파동에 이르러 거적에 덮인 홍낙민(루카)의 시신을 보고 애도하며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서소문 밖에서는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줬다. 한덕운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는 신분이 탄로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은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한덕운 복자의 행적을 머리에 그리며 순교자현양비 앞에서 순교자들의 신앙과 용덕을 묵상하고 남한산성순교성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 위령 성월을 뜻깊게 보내는 신자들의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 남한산성순교성지 십자가의 길을 걷다 보면 ‘백지사’(白紙死) 형벌을 당하고 있는 순교자상과 마주치게 된다. 백지사는 병인박해 때 시작된 처형 방식으로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해 숨이 막혀 죽도록 했다.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군사들이 신자들을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법전에도 없던 잔혹한 형벌이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백지사 순교자상을 바라보며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남한산성 동문 모습. 동문 밖은 남한산성 첫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이 처형된 곳으로 알려진다.

■ 남한산성 동문과 동암문

남한산성 순교자들은 처형당한 후 동암문(東暗門)을 통해 계곡에 버려졌다. 동암문은 남한산성 동문(東門)에 인접한 암문을 가리킨다.

암문은 적군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 놓은 작고 비밀스러운 통로다. 시체를 버리던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는 5.6m에 달해 남한산성에 있는 암문 16개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하지만 지금도 일부러 찾으려 하지 않으면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남한산성 순교자들은 동암문 아래 계곡에 버려져 오랫동안 방치되고 짐승들에 의해 훼손됐다. 위령 성월에 남한산성순교성지를 찾은 신자들이 성지에서 1㎞ 정도 떨어진 동암문까지 순례하고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졌던 계곡을 내려다본다면 자신의 삶이 향하고 있는 방향과 함께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서 백지사(白紙死)로 처형된 순교자상. 백지사는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해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처형 방식이다.

남한산성순교성지 성당 입구 표지판.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