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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다 하느님을 만나다] (3) 성거산성지 무명 순교자 묘지와 교우촌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1-07-13 수정일 2021-07-13 발행일 2021-07-18 제 3254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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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까이 산마루에서 천상 행복을 염원하다
해발 579m 성거산 정상 부근 신유박해 피해 형성된 교우촌 120년 동안 신자들 모여 지내
최양업 신부 사목지이기도
병인박해 시기에 스러져간 하느님의 종 배문호·최종여와 무명 순교자들 함께 묻혀 있어
생명력 강한 야생화와 닮아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에 복원된 옛 교우촌 초가. 성거산 교우촌은 1920년까지 120년 동안 존속했다.

천안 성거산은 고려를 건국하기 전 태조 왕건이 수헐원(愁歇院)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동쪽 산에 오색구름이 영롱한 모습을 바라보고 ‘신령이 사는 산’이라는 뜻으로 거룩할 성(聖)자와 거할 거(居)자를 써서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1100여 년 전에 이름 붙여진 성거산은 가톨릭 신앙인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성스러움이 거하는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성거산에 소학골 교우촌과 서들골 교우촌 등이 만들어져 이곳 교우촌을 중심으로 가경자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방문하거나 사목을 펼쳤고, 1866년 병인박해 시기에 숱한 순교자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거산은 천주교 성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거산성지를 찾아 자연을 벗하며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신앙선조들의 숨결을 느꼈다.

■ “아! 성거산!”

성거산성지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할 정도로 길고도 굴곡지고 가파르다. 국내 성지로서는 보기 드물게 해발 579m 성거산 정상 부근에 형성돼 있다. 성거산성지 6.2㎞ 전에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안내판이 처음 나온다.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게 된다.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 전방 3.5㎞’라고 적힌 안내판 위치부터는 성거산 산길에 접어든다. 과거 박해시기를 살던 신앙선조들이 신분을 숨기고 가슴을 졸이며 걷던 산길을 차로 오르면서도 “아! 성거산!”이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이렇게도 외지고 척박한 곳까지 올라와 서로 의지하고 형제애를 나누며 믿음을 키웠던 신앙선조들은 산이 높은 만큼이나 하느님을 가까이 모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성스러움의 본래 의미를 성거산성지에서 발견하는 듯했다.

천안 성거산성지 ‘순교자의 길’이 시작되는 곳에 세워진 순교자 조각상.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 줄무덤과 무명 순교자 상징하는 야생화

‘제1줄무덤’이라고 새겨진 돌기둥과 ‘무명순교자상’ 앞에서 성거산성지 순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노라면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이 주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고요함을 깨뜨리는 온갖 새소리와 매미 울음소리는 오히려 성지의 평화로움으로 다가온다.

‘제1줄무덤’이 시야에 들어오자 이내 마음이 숙연해진다. 병인박해 때 소학골 교우촌 출신 하느님의 종 배문호(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등 이름이 알려진 5명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순교자들 앞에서 순교는 못하더라도 순교 정신은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는 전구를 청하게 된다.

‘제1줄무덤’을 나오면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성모광장을 지나 제2줄무덤 앞까지 이어지는 14처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타 언덕처럼 산을 따라 오르면서 예수님이 받았던 고통을 묵상하는 길이다. 14처 조각상 주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순례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야생화는 무명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꽃들입니다 - 성거산성지’라는 작은 안내문이 보인다. 그제야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생명의 신비와 변치 않는 자신만의 모습을 간직한 야생화가 순례자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뚜렷이 다가온다.

야생화가 상징하는 순교자 정신과 예수님이 짊어진 고통이 겹쳐지는 십자가의 길을 마치면 ‘제2줄무덤’에 이르게 된다. ‘제2줄무덤’을 바라보고 서 있는 4명의 순교자 조각상은 처참하게 상처 나고 깨어진 얼굴을 한 순교자들이 극심한 수난 속에서도 서로 어깨를 부축하는 형상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자’며 마지막 남은 생명이 외치는 무언의 소리가 순교자 조각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숭고함이 전해진다. 조각상 밑에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라는 성경구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성거산성지 순교자들이야말로 하늘을 가까이한 곳에서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한 분들이었을 것이다.

성거산성지 제1줄무덤에는 성거산 교우촌에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신앙선조들이 묻혀 있다.

■ ‘순교자의 길’ 따라 교우촌터 만나다

제2줄무덤에서 나오면 성거산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벗하며 살았던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길 이름은 ‘순교자의 길’이다.

길 옆에는 103위 성인 이름, 세례명과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가 적힌 유리병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103위 성인 이름과 세례명을 읽고 짧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바치며 ‘순교자의 길’을 걷기만 해도 마음 한편에는 뜨거운 감정이 일어난다.

성거산성지 교우촌터에는 아담한 초가 세 채가 복원돼 있다. 신유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이 모여 만든 성거산 교우촌은 1920년까지 120년 동안 그 역사가 계속되다 사라졌다. 복원된 초가들이 옛 교우촌 풍경을 일부라도 전해 줄 뿐이다. 교우촌 외형이 사라진 지는 100년이 넘었지만 그곳에서 살았던 신앙 선조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은 지금도 우리 시선을 신앙의 길로 재촉하고 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