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르포]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살림터’를 가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1-03-30 수정일 2021-04-01 발행일 2021-04-04 제 3238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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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지만 쉼 없이 키워낸 생명, 진한 향기를 머금다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허브 재배
건조 과정 거쳐 잎 고르고 포장까지
지적장애인 31명 모든 과정에 참여
근로자 아닌 가족으로 동행하며
인권 존중 우선으로 작업 환경 조성
성취감 향상시켜 삶의 의욕 높여

살림터에서 근무하는 지적장애인들이 허브 삽목작업을 하고 있다.

따사로운 봄햇살과 함께 덩달아 마음이 설레는 4월. 생명이 움트는 4월의 정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는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든다. 그리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묵상하며 지금 내 곁에 존재하는 생명의 발자국을 쫓는다.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살림터’는 움트는 새싹처럼 생명력이 가득한 곳이다.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지적장애인의 삶에 대한 의욕을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곳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만날 수 있다.

■ 생명을 살리는 삶의 터전

충북 제천시 배론성지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살림터. 장애인 거주시설 살레시오의 집과 이웃하고 있는 이 곳은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이사장 곽호인 신부) 산하 장애인 직업재활시설로, 지적장애인 31명이 일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친환경 허브차 재배부터 포장, 판매까지 이어진다. 지적장애인의 업무가 조립이나 제조 등 실내에서 이뤄지는 단순노동에 국한된 것을 개선하고자 자연 속에서 흙을 만지면서 일할 수 있도록 친환경 허브 재배를 선택한 것이다.

살림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와 노지에서 재배된 허브는 건조과정을 거쳐 잎을 따고 병에 담고 포장해 판매한다. 이 모든 과정은 지적장애인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땅과 생명을 살리는 터전이라는 살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의 허브는 모두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재배된다.

살림터 조현진(프란치스코) 원장은 “살림터는 일반고용이 어려운 장애인이 특별히 준비된 작업 환경에서 직업 훈련을 받거나 직업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며, 지적 장애인들이 함께 참여해 직업에 대한 성취감과 자존감을 향상시켜 삶의 의욕을 높여줄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직업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교육하는 센터인 만큼 직업 상담부터 평가까지 근로 장애인을 체계적으로 관리, 개인의 능력과 흥미를 고려해 직무를 배치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온 지적장애인들은 일정 기간 훈련생을 거쳐 근로자로 일하게 된다.

백경선(에스텔) 사무국장은 “같은 자리에 10분도 앉아있기 힘들어 했던 분들이 반복훈련을 통해 몇 년 뒤에는 1시간이 넘게 앉아서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며 “자신만의 속도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분들을 보면 뿌듯하면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을 위해 기다려주고 관심을 가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배론성지에 마련된 허브사랑카페에서 음료를 나르고 제조하는 일도 돕는다. 사회적응 훈련의 일환으로, 살림터와 비닐하우스를 벗어나 비장애인들과 만나 소통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조현진 원장은 “장애인 복지 정책이 시설보호에서 지역사회 보호로 패러다임이 전환됨에 따라 살림터 운영에 있어서도 그러한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장애인의 특성에 맞게 직업재활시설을 운영해 개개인의 취업을 통해 자아실현은 물론이고 지역사회에 환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희의 역할이라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살림터에서 근무하는 지적장애인들이 말린 허브잎을 고르고 있다.

배론성지 안에 있는 허브사랑카페에서 살림터에서 일하는 지적장애인이 커피를 만들고 있다.

살림터에서 만든 허브차는 배론성지 내 허브사랑카페와 온라인쇼핑몰(www.herblove.org)에서 구입할 수 있다.

■ 느리지만 뚜벅뚜벅 부활의 길을 향해 걷다

“살림터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게 뭐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림터에 들어와 3년간 일하고 있는 김우찬씨는 기자의 질문에 눈동자를 굴리며 두 손으로 탁자를 매만진다. 오랜 정적에 답변할 말이 없는가 싶어 다른 질문을 찾으려 수첩을 뒤적이는데 뒤늦게 김씨는 입을 뗐다. “어… 다른 근로자와 일하면서 많이 웃을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이끌어준 선생님한테도 감사해요.”

다음 질문에도 김씨는 답을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자신을 취재하러 온 손님에게 대답을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며 ‘기다려보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매끄럽고 유려한 말솜씨는 아니었지만, 김씨는 정직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다른 질문을 했더라면 듣지 못했을 말들이었다.

지적장애인과 오랜 시간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기자에게 ‘기다림’은 낯설고 적응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20년 넘게 살림터에서 지적장애인과 함께해 온 백경선 사무국장은 “비장애인인 분들이 3년이 걸릴 일이면 지적장애인들은 10년이 걸려요”라며 “그들의 장애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 그들은 아주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데 비장애인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취재를 위해 살림터를 방문한 3월 25일, 비닐하우스에서는 노지에 심을 허브의 삽목작업이 한창이었다. 다섯 명의 근로자들이 허브에 물을 주고, 줄기를 다듬는 등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김인태씨는 일반 회사를 다니다가 3년 전에 살림터를 찾았다. “자동차 부품회사를 다녔는데, 손이 느리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부모님의 소개로 3년 전에 이곳에 왔는데 적성에 너무 잘 맞았죠. 꽃과 허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져 일하는 게 가장 좋아요.”

지적장애인의 일터로 살림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을 근로자가 아닌 ‘가족’으로 여기고 동행하는 가톨릭 정신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시설에서 차별이나 괴롭힘으로 상처를 받고 살림터에 들어온 일부 장애인들의 부모들은 “가족적인 분위기와 건강한 작업 환경이 다른 시설과 다른 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조현진 원장은 “장애인들이 없으면 저희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장애인들의 인권 존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겨우내 추위를 견딘 단단한 땅에 모종을 심어 물을 주고 정성스레 돌본 뒤에야 만날 수 있는 허브. 잎을 따서 말리고 고르며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쳐야 맛좋은 허브차가 완성된다.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정성만큼 향과 맛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곳의 지적장애인들은 집중력이 떨어지고, 손이 느리고, 소통이 더딘 어려움들을 느리지만 천천히 이겨냈기에 깊은 향이 담긴 허브차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살림터의 시간과 함께한 지적장애인들의 현재가 값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후원 계좌: 농협 421034-51-081882(예금주 살림터)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