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1-02-16 수정일 2021-02-16 발행일 2021-02-21 제 323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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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 빌려 시작한 공동체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창설자 성 카르멘 살례스.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서 자신을 ‘원죄 없으신 마리아’로 밝혔다. 이 사건들은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창설자 성 카르멘 살례스(1848~1911)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어린이들의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심고 싶다는 열망의 토대이기도 했다.

당시 19세기 유럽은 다양한 변화 속에 혼란한 모습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영향으로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 세속적인 것에 중심을 뒀다. 사회 계급에도 변화가 생겨 교회와 귀족은 힘을 잃고 공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가 형성됐다. 사회주의의 선동과 무정부주의자들 활동으로 노동자들의 조직이 발전했다. 내란과 테러로 불안감이 감돌았고 콜레라도 창궐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 교육 체제는 붕괴됐고 이로써 어린이와 젊은이, 특히 여성들은 교육 혜택을 받기가 어려웠다.

교회의 어려움도 컸다. 정부는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런 억압 가운데서도 시대 요구에 따라 사회복지나 교육에 투신하는 많은 수도회가 창립됐다.

184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카르멘 살례스는 수도 성소를 원해 성체 흠숭 수녀회에 입회했으나 카리스마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서원 전 수도회를 나왔다.

그러나 매춘 범죄에 빠진 탈선 여성들의 선도에 힘썼던 이 수도회에서 성인은 탈선 여성들의 삶에서 어릴 적부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여기서 ‘습관이 두 번째 본성을 형성한다’는 기본적인 직관을 얻었다. 이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예방 교육이라는 새로운 사명으로 연결됐다.

이후 성인은 영적 지도신부의 인도에 따라 영보 도미니코 수녀회에 입회해 20여 년간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무지한 아이들과 청소년을 교육하는 사도직을 실천했던 이 수녀회는 시국의 혼란으로 문서상으로 인준받지 못한 상태였고 도미니코회 제3회 형태로 운영됐다.

그런 가운데 교사와 원장으로 일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던 그는 다양하고 고통스러운 사건 속에서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1892년 3명의 다른 수녀와 함께 수녀회를 떠났다.

그해 10월 15일 스페인 부르고스에 도착한 성인은 12월 7일 부르고스대교구 도움으로 학교 개교를 허락받았다. 수녀들은 다음날 12월 8일 원죄 없으신 마리아 색상인 푸른색과 흰색 수도복을 입었다. 빌린 헛간에서 의자도 없이 탁자 한 개를 두고 감자 몇 개로 저녁 식사를 했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첫 공동체의 시작이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