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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차 세계 평화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 담화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0-12-28 수정일 2020-12-29 발행일 2021-01-01 제 3226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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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돌봄의 문화’ 없이는 평화도 없다
인간 존엄·공동선·연대 등 사회교리 원칙에 바탕 둔 돌봄의 문화 실천 노력 강조
군축 통한 ‘세계 기금’도 제안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8년 1월 1일 “평화란 생명과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지닌 가장 높고 절대적인 가치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교회는 매년 한 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고, 교황은 담화를 발표한다.

2021년 제54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주제는 ‘평화의 길인 돌봄의 문화’다. 2020년 한 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고통을 겪은 인류는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돌보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돌봄의 문화임을 호소하고 있다.

■ 평화의 길, 돌봄의 문화 증진해야

9개 항목으로 구성된 담화 첫 항에서, 교황은 코로나19로 인한 고통, 이를 극복하려는 애덕과 연대의 실천, 여전히 발견되는 긴장과 갈등을 동시에 지적한다. 교황은 코로나19가 “기후, 식량, 경제, 이주 문제처럼 서로 밀접히 관련된 위기들을 더욱 악화시키고 큰 고통과 불안을 야기했다”며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고 말했다.

교황은 의사, 간호사, 약사, 연구가, 자원봉사자, 원목 사제, 병원과 보건소 직원들이 큰 노고와 희생으로,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면서 생명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음을 기억하며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동시에 교황은 “여러 형태의 국수주의,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증, 심지어는 죽음과 파괴의 씨앗을 뿌리는 전쟁과 분쟁도 새롭게 기승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인류는 이제 만연한 무관심과 대립의 문화에 맞서 싸우기 위해 ‘평화의 길인 돌봄의 문화’를 증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돌봄,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제자들

교황은 창세기가 전하는 인간과 땅, 형제자매 이야기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이 돌봄에 대한 우리 인간 소명의 원천임을 일깨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땅을 ‘일구고 돌보는’(창세 2,15) 임무를 맡김으로써 인간이 피조물과 맺은 관계를 보여 준다. 또한 카인과 아벨의 탄생으로 ‘형제자매의 역사’가 생겨났다.

인간과 자연, 인간 서로간 관계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의 삶과 자연과 맺은 관계를 올바로 돌보는 것은 형제애, 정의,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돌보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직무는 성부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계시의 정점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연민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다. 그 사명의 정점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인류를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르는 초기 교회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에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나눔을 실천했다.

■ 돌봄 문화의 바탕, 사회교리 원칙들

프란치스코 교황은 6항에서 교회의 사회교리 원칙들이 돌봄의 문화의 바탕을 이룬다고 강조한다. 교황은 “교회의 사회교리는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돌봄의 ‘원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원칙과 기준, 지침들을 담은 소중한 자산”이라며 인간의 존엄 증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의 연대, 공동선 추구, 피조물 보호를 그 원리로 제시했다.

▲인간 존엄과 권리를 증진하는 돌봄:

교황은 그리스도교의 인간 개념은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을 확언한다며 “그러한 존엄에서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는 곧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우리의 모든 ‘이웃’을 환영하고 도와줘야 할 책임을 말한다.

▲공동선에 대한 돌봄:

공동선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다. 교황은 코로나19가 이를 확실하게 보여 줬다며 “코로나19에 직면해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지적했다.

▲연대를 통한 돌봄:

교황은 또한 “연대는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 항구한 결의이고 우리가 다른 이들을 이웃으로, 길동무로, 하느님께서 모두 똑같이 초대해 주신 그 생명의 잔치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이들로 바라보게 해 준다”고 말했다.

▲피조물 보호와 돌봄: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모든 피조물의 상호 연관성을 인정하고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피조물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 기울일 필요성을 강조한다. 교황은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평화와 정의, 그리고 피조물 보호 이 세 가지는 서로 긴밀히 연결된 주제”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54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돌봄의 문화임을 강조했다. 사진은 2019년 11월 17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바오로 6세 홀에서 로마의 노숙인 등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해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교황. CNS 자료사진

■ 공동항로를 위한 나침반

교황은 ‘버리는 문화’와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에서, 앞서 언급한 원칙들을 나침반으로 삼아 이 ‘나침반’을 손에 들고 세계화 여정에 공동 항로를, ‘참으로 인간다운 항로를’ 제시해 주도록 전 세계 지도자들을 초대했다. 교황은 오늘날 안타까운 세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많은 지역과 공동체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았던 시절을 더 이상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시민들은 폭발물, 대포, 소형 무기들의 무차별 공격에 맞서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기근이라곤 전혀 없었던 곳에서도 기근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은 묻는다. “무엇이 세상에 분쟁의 일상화를 가져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연대와 형제애 안에서 참으로 평화를 추구하도록 우리 마음을 돌리고 우리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교황은 지속해서 되풀이했던 제안을 다시 한번 피력한다.

“무기와 다른 군비에 투자할 돈으로 결정적인 기아 퇴치와 최빈국 발전 지원을 위한 ‘세계 기금’을 설립하기로 한다면 이 얼마나 용감한 결정이겠습니까!”

■ 돌봄의 문화를 위한 교육

교황은 돌봄의 문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돌봄에 관한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학교와 대학교는 가정과 협력해 교육을 책임지며, 사회커뮤니케이션 주체들 역시 교육 책임을 지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연대, 다름에 대한 존중, 환대, 가장 힘없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돌봄, 이러한 가치들을 믿는 이들과 사회에 전하는 데에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마지막 9항에서 교황은 “돌봄의 문화는 모든 이의 존엄과 선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연대하고 참여하는 공동 투신으로서 돌봄의 문화 없이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돌봄의 문화는 평화 건설을 위한 특권적인 길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상처들을 치유하도록 이끄는 평화의 길들이 필요합니다. 독창적이고 담대하게 치유와 새로운 만남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평화의 장인들이 필요합니다.”

교황은 이어 “희망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바라보며,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이뤄진 공동체 형성을 위해 날마다 구체적으로 노력해 나가자”고 권고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