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주의 맞서 교회 쇄신 추구하며 영성체 중요성 강조 정치적 교황 아닌 종교적 교황 교회 쇄신 주요 과제로 삼아 교회 음악 규범 제시하며 그레고리오 성가 가치 높여 성가대에 대한 인식도 재정립 영성체 강조했던 ‘성체의 교황’ “가능하면 매일 영성체 할 것” 성체성사 의미와 중요성 부각 첫영성체 7세로 앞당기기도 성무일도·미사 거행 규정 개편 교회 안에 커다란 영향 발휘한 현대 전례 운동의 개척자
전 세계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교회 안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성 비오 10세 교황(재임 1903~1914)은 매일 영성체할 것을 강조하는 등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고자 했다. 교황은 교회 개혁과 신앙쇄신을 위해 전력을 다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쇄신의 길을 닦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을 맞아 교황이 강조했던 전례와 영성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 단순한 삶과 겸손한 마음
성인은 ‘가톨릭운동’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 꼽힌다. 그리고 교계제도 아래에서 교회의 사도적 과제에 대해 평신도들과 협력함으로써 가톨릭 운동의 선구자가 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모더니즘에 대항해 직선적이면서도 강력하고 단호하게 맞섰던 그는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종합’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1910년 9월 1일부터 모든 서품 후보자와 사목자들은 반근대주의 서약을 이행해야 했다. 그의 재임 마지막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위협으로 뒤덮인 기간이었다. 한 서한에서 “만일 유럽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나의 온 목숨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기록할 만큼 당시 정세에 대한 고뇌가 깊었다. 여러 면에서 보수적이었지만 건설적인 개혁 교황이었던 성 비오 10세 교황. 생애 동안 성인으로 존경받았던 그는 결단력과 조직력이 뛰어났고 선량하고 겸손했다. 또 단순성과 오직 한결같은 선한 마음과 가난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랑했다. 교회를 위해 행한 개혁 활동의 긍정적인 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시도된 변화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그는 1914년 선종했으며 1954년 시성됐다.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