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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탄생 100주년 특집]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한국교회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20-05-19 수정일 2020-05-19 발행일 2020-05-24 제 319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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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땅’에 각별한 애정 표했던 교황… 한반도 평화도 기원
모국 폴란드와 한국서 동질감
1984년·1989년 두 차례 방한
개발독재에 지친 국민들 위로
이후에도 메시지로 관심 전해와

지난 5월 18일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26여 년 동안 전 세계 누비며 교회의 복음적 가치를 전파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84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한국과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여줬던 한국과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 ‘내 마음은 한국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3일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을 축하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4박5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교황은 5월 3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한국어로 또박또박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라고 읽었다.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을 인용해 그는 한국의 오랜 벗임을 강조했다.

교황은 진정으로 자신을 한국인의 벗으로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그의 노력에서 드러난다. 당시 로마에서 유학하며 교황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지난 1984년 첫 한국 방문을 앞둔 교황님은 독일 치하의 폴란드에서 자라서인지 ‘내가 어떻게 한국에 가서 다른 나라 말로 미사를 집전하겠는가’라며 한국어 미사를 고집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교황은 실제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40여 차례나 한국어를 배우고, 17차례나 한국어 미사를 연습했다.

이 땅의 평화를 간절하게 바랐던 교황의 소망은 그가 방한 전 발표한 담화문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 마음은 한국에」를 제목으로 발표한 담화문에서 교황은 “며칠 있으면 오래 그리던 여러분을 찾아 로마를 떠나 한국으로 먼 길을 나서게 된다”면서 “그래서 이제는 내 마음이 이미 한국에 가 있다고 할 만큼 여러분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한반도 온 겨레의 아픔과 희망을 같이하면서 하루 바삐 모두가 평화롭게 도로 하나의 화목한 가족이 되어 복되이 살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간절하다”면서 “온 인류의 불화로 많은 고통을 받아 온 여러분의 나라가 도리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인류의 상징이 되었으면 그 얼마나 아름답겠냐”라고 덧붙였다.

■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

교황이 5월 3일 낮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비행기 트랩 아래 엎드려 땅바닥에 입을 맞추던 장면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교황은 당시 “순교자의 땅”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순교자의 피로 성장한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방한 기간 동안인 5월 6일 교황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대회를 주례했다. 특히 이날 미사의 백미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103위 순교자의 시성식으로, 시성식을 로마 밖에서 거행한 첫 사례였다. 교황은 시복시성식을 바티칸에서 거행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깨는 파격을 선보였다. 당시 주교회의는 한국 신자들이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103위 성인들이 가톨릭 신앙의 싹을 틔운 바로 이 땅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도록 한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 줄 것을 건의했고, 교황은 이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03위 성인 시성은 또 다른 교황의 파격적인 결정으로 가능했다. 복자가 성인이 되려면 복자의 전구로 인한 기적이 확인돼야 한다. 하지만 당시 한국교회의 실정으로는 103위 복자들 모두의 전구를 통한 기적을 입증하기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주교회의는 교황에게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이룬 것이야말로 103위 복자들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만큼 103위 복자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한 기적 심사를 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한국교회의 청원을 받아들였고, 103위 복자들이 동시에 시성될 수 있었다.

교황은 시성식 미사 강론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가 그처럼 훌륭히 꽃피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순교자들의 영웅적 증거의 열매”라고 강조했다. 또 교황은 미사 뒤 인사말에서 “사목 방문 동안 순교의 기반 위에 자라는 한국교회를 보고 감탄했다”면서 “이 모든 것은 두 세기에 걸쳐 맺어진 열매, 한국 순교자들의 놀라운 순교의 열매”라고 덧붙였다.

1984년 첫 방한 당시 비행기 트랩 아래 엎드려 ‘순교자의 땅’에 입을 맞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89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중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오른쪽)과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한국교회 중흥의 발판 마련

교황은 1984년 사목방문 당시 서울과 광주, 대구, 부산을 돌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사제서품식을 주례하고 노동자와 농어민, 서민, 한센인 등을 두루 만났다. 여의도광장과 광주 무등경기장, 대구시민운동장 등에서 교황이 주례한 미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특히 교황은 당시 개발독재로 고통받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큰 상처를 입었던 우리 국민들을 위로했다. 교황은 40만여 명이 모인 부산 근로자들과의 만남에서 개발독재에 인권을 침해당한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줄 것을 촉구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와의 만남 때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던 젊은이가 수감 시절 자신의 양말을 풀어 엮은 십자가를 교황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교황은 광주 방문 때 행사장인 무등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5·18 상처가 배어 있는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거쳐 갈 것을 고집하기도 했다.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신자수가 1980년 132만여 명에서 1986년에 200만 명을 넘는 등 급속하게 성장했다. 또 200주년 사목회의를 통해 내부로는 시대의 징표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전기를 맞이했다.

교황은 1989년 10월 5∼8일 짧은 일정으로 두 번째 방한했다.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위해서였다. 이때도 65만 명이 몰린 여의도광장 행사에서 남북한 화해를 기원하는 평화메시지를 낭독했다.

그는 이후에도 교황은 한국에 큰일이 있을 때면 종종 애정 어린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는 축하 메시지를, 2002년 태풍 루사 피해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등을 당했을 때는 위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교황의 이런 한국에 대한 애정 뒤에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민족의 정통성을 꿋꿋이 지켜온 역사가 모국 폴란드와 닮았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크라쿠프 인근 바도비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 나치 치하에서 비밀리에 운영됐던 크라쿠프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교항은 26세인 1946년 사제품을 받았다. 1964년에 크라쿠프대교구장, 1967년에 추기경에 서임됐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 33일 만에 선종하자, 같은 해 10월 16일 제264대 교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교황의 나이는 58세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역대 어느 교황보다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것을 포함해 104차례 해외 사목방문에 나섰으며, 여행거리는 193만km에 이르렀다. 말년에 파킨슨씨병으로 투병하면서도 끝까지 교황의 직무를 다하다 2005년 4월 2일 선종했다. 2011년 5월 1일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4월 27일 시성했다. 축일은 10월 22일이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