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책으로 만나는 순교 영성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19-09-24 수정일 2019-09-24 발행일 2019-09-29 제 316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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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형 및 여자 이간난, 여자 우술임, 여자 김임이, 여자 정철염 등에게 여러 차례 주리를 틀며 매질하며 갖은 방법으로 따져 물었는데, 고집스럽기가 나무나 돌과 같아서 끝내 종교를 배반할 수 없다는 뜻으로 똑같은 말로 진술을 바쳤으므로, 아울러 엄히 매질하여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 포도청에 관한 기록이 담긴 「우포도청등록」에는 1846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고문을 받다 처형당한 5명의 천주교인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굶주림에 썩은 멍석을 뜯어먹거나 빈대와 벼룩을 먹던 이들은 죽은 뒤 광희문 밖에 버려졌다. 혹독한 고초를 견뎌내며 이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신앙’이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은 이들에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게 풍요로워진 지금, 신앙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됐고 하느님은 잊혀가는 존재가 됐다. 순교자를 기억하며 보내고 있는 9월, 두 권의 책을 통해 순교 영성을 살펴보며 내 삶과 신앙을 쇄신할 수 있는 전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

 -한정관·서종태·안창모·원재연·강석진 지음/398쪽/2만 원/천주교서울대교구 광희문성지순교자현양관

서울 중구 퇴계로 광희문 옆을 지키고 있는 천주교순교자현양관은 광희문 밖의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렸던 광희문은 한양 도성 안에서 시신의 매장을 위해 성 밖으로 나갈 때 주로 사용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에는 옥사 순교한 치명자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지고 묻혔으며 그 수는 794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이에 2014년 광희문 성지 담당 신부로 임명된 고(故) 한정관 신부는 성지 조성을 위해 학문 연구를 계획했고, 3명의 연구자가 함께했다. 이들은 광희문 성지의 실체와 관련 순교자들의 영성을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고 2017년 학술대회를 통해 그 내용을 공유했다.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은 학술대회 때 발표한 논문을 비롯해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의 「지도와 사진 그리고 신문기사로 읽는 광희문 밖의 근대기 변화」 논문이 담겼다. 책을 통해 광희문 밖의 근대기 변화를 비롯해 그 곳에 매장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던 순교자들의 삶은 지금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 「중공 치하에서 외국인 선교사들 추방과 강제 노동 수용소의 선교사들」

 -서양자 수녀 지음/416쪽/1만8천원/순교의맥

조선시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혹독했다면, 중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921년 공산당이 창당된 후 외국인선교사를 대상으로 무참히 이뤄졌다.

1928년 장지에시(蔣介石)가 난징(南京) 정부를 수립하자 비오 11세 교황이 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공산당은 천주교를 장지에시파로 간주하고 외국인 선교사와 신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시작했다. 중일전쟁 기간이었던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항일을 목적으로 공산군으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내 반공 게릴라의 활동이 격화됐고, 공산당은 교회 내의 반혁명 인사를 색출하고자 ‘삼자(三自) 운동’를 추진한다. 삼자에 속하는 자치(自治·중국 교회는 자율적으로 다스린다)의 뜻을 따라 애국교회가 형성됐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가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 실상은 참혹했다. 라오허고우(老河口)교구의 한 신부는 천장에 매달린 채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었으며 십자가에 하루 동안 묶여 있다 순교한 신부도 있다고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신부와 수녀의 묘를 파헤쳐 고인을 모욕했으며, 성체를 길가에 뿌려 훼손하는 일도 잦았다.

「중공 치하에서 외국인 선교사들 추방과 강제 노동 수용소의 선교사들」은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자 수녀는 40여 년간 홍콩과 대만을 오가며 중국교회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공산당 창립시기부터 중일전쟁, 일본 패망 후, 공산당 창립 이후까지 30여 년간 이어진 박해의 흔적이 책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박해의 참혹함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외국인 선교사, 그리고 중국 신자들의 굳은 신앙심이다. 신부들은 목숨이 위험한 가운데서도 애국교회 가입을 거부했으며, 신자들은 고발된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공산당의 추궁에 “죄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모진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중국교회의 기록을 살펴보며 우리나라 교회사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